기독교 하나님의 나라의 이해와 현대 신학

▶ 기독교 하나님의 나라의 이해와 현대 신학

1.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처음도 하나님 나라이며, 마지막도 하나님 나라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였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을 선포하므로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누가 문서에 보면 부활 한 후 40일 동안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약학자 래드(G. E. Radd)는 공관복음서의 중심 주제는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라고 말한다.

1)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라는 말은 구약 성서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개념은 구약 성서 전체에 결쳐서, 특히 선지자들의 글에서 발견된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 특히 역사의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은혜로운 변호 -를 가리킨다.

2) 구약의 하나님 나라
구약성서에서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에 대한 용어는 직접 나오지 않는다. 다만 “야훼의 나라”(대상 28:5)와 “주의 나라”(시 45:6; 시 145:11-13)로만 표현이 나타난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용어가 제한적이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표현(“말쿠트 샤마임”)이 있지만, 이런 히브리어 어구들은 모두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 문헌에 가서야 등장하는 용어들이다.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한 것은 묵시 문학이 등장하면서부터 라고 왕대일은 설명한다. 구약 성서적인 표현이나 어구는 “야훼께서 다스리신다”(출 15:18), “야훼께서 왕이 되신다”(시 93:1; 96:10; 97:10)와 같은 말들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야훼 하나님이 왕으로서 통치함을 의미하며 공간적이고 정적인 개념이기보다는 역동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의미한다.


예수는 묵시문학적 전승을 이어 받아 종말론적 사건으로 새 세대(New Age)를 여는 하나님 나라가 임박한 것으로 선포하였다.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βασιλεία 선포에서 분명한 뜻이 드러난다. βασιλεία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와 구원의 영역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역사와 시간과 현세를 초월한 내세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를 나타낼 뿐 아니라, 동시에 역사와 현재의 삶의 현장 속에 들어와 인간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통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공간과 통치 개념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 관계가 동일한 복음서 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또한 시간적인 면에서도 현재와 미래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로도 나타난다.

2. 하나님 나라의 특성

1) 공간성과 통치성의 의미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개념이 공간성이냐 통치성이냐 하는 문제는 학자들 간에 계속 논란이 되어 왔다. 하나님 나라에서 중심되는 개념이 하나님의 통치(reign)인가, 아니면 그가 통치하시는 영역(realm)인가? 또는 두 가지 요소 모두인가? 그리고 두 요소의 관계성은 어떠한가?


① 공간적 의미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통치개념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간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다”(막 9:47)는 표현이 사용되어지고 있다. 또한 “하나님 나라 안에서”(막 14:25) 라는 공간적인 혹은 영역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έν은 어느 일정한 공간이나 영역을 향하고 있는 전치사로 공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② 통치적 의미
a.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υ θεου)의 의미를 구약적으로 잘 반영하는 표현은 ‘하나님의 통치’(Malkut Jahwe)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구약의 하나님은 왕으로서 통치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통치하실 분으로 묘사된다. 이때 하나님의 왕되심은 이중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타나고, 둘째는 세상의 왕으로 불리어진다. 이러한 내용은 동사 “말락”(malak) 또는 인칭명사 “멜렉”(melek)의 도움을 빌어 표현된다.
b. 왕권 통지의 내용들로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의 신정체제와 동일시하고 로마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를 구분하면서 통치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바울의 “두 에온 사상”(two Aeon: this Age and the Age to Come)에서 분명히 다루어진 사단의 통치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새로운 통치개념으로 이해된다.

③ 공간적 의미와 통치적 의미의 긴장 관계성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안에서”(ἐν τῇ βασιλείᾳ του θεου)라는 용어는 마가복음 14장 25절에만 나온다. 여기서 ἐν은 어느 일정한 공간이나 영역을 향하고 있는 전치사로 공간적 의미를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다. 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다”(εἰσελθειν εἰς την βασιλεία του θεου)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들어가다”(είσελθειν) 동사도 어느 일정공간을 향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1) 현재성과 미래성의 의미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제를 분석해 보면 그 나라를 현재적 실재로 말하는 곳들과 또 그 나라를 미래에 실행되어질 어떤 곳을 말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보스(G. Vos)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양면적임을 밝히고, 또한 양면적으로 되었음을 찾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① 현재적 의미
신약성서에서 예수와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관계는 그 나라의 미래에 관한 그의 진술을 고려하지 않으면 완전할 수 없으며, 동시에 그 미래에 관한 진술들은 예수와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관계 고찰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을 제시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양면성으로 해석해야 됨을 말하는 것이다. 다드(C.H. Dodd)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의미를 “실현된 종말론”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수의 사역 속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다고 주장한다.

② 미래적 의미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의미는 하나님 나라가 아직 실현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임하는 것이며 미래에 성취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사역으로부터 시작되었던 하나님 나라의 일은 미래적인 완성을 기대하고 있음을 표현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마귀와 그의 사자들이 궁극적이며 완전한 파멸을 당하고 악에 물들지 않는 구속된 무리가 형성되어 메시야적인 잔치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나눌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오는 세대(the Age to Come)와 같은 뜻을 지닌다. 복음서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많은 구절과 비유들이 미래의 “그 날”을 말하고 있다.

2) 성장성의 의미
하나님 나라의 성장성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재로서 이해된다. 다드(C. H. Dodd)는 복음서의 비유들을 구분하면서 특별히 성장비유(Parables of Growth)의 항목을 설정하여 이 비유 속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를 포함한다. 그는 이 비유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한정되지 않는 성장 기간, 그리고 마지막 완성의 때의 도식에서 해석하고 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모든 성장 비유들의 공통적인 대조의 비유이다. 이 비유의 삶의 정황은 하나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이미 도래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이다. 이것은 장차 세상을 다스리게 될 하나님 나라가 거의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세상에 들어와 겨자씨처럼 성장하고, 누룩처럼 부풀고 확장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뿌려진 씨가 완성의 때와 풍성한 결실을 거둘 때까지 각기 다른 땅에서 성장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풍성한 결실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유 속에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핍박과 환난이 있다할지라도 씨 뿌리는 일과 열매 맺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3. 현대 신학의 하나님 나라 이해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현대적인 논의는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그의 신학의 중심에 설정하고 현대신학 논의의 초점이 되게 하였다.

1) 철저종말론
① 바아쓰에 의하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리츨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간에 의해 실현되어져야 할 윤리적 가치들의 나라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하여 철저한 대립 가운데 있는 초세계적인 것”이다.
② 슈바이처에 의하면 예수는 도덕교사가 아니라, 당시의 묵시사상가들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초월적으로 돌입할 것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예수가 이 세계의 밖으로부터 초월적으로 올 것이라 기다렸던 세계의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역사의 수레바퀴에 매달아,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세계의 자연적 역사를 끝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어오고자 하였으나, 이것은 실패로 끝났다. 그의 시체의 찢겨진 조각들이 아직도 바퀴에 붙은 채 역사의 수레바퀴는 지금도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다. 이로써 종말론은 철저히 불가능하게 되었고 또 불필요하게 되었다고 슈바이처는 주장한다. 그는 묵시사상적 광신 속에서 실패로 끝난 역사의 예수를 버리고, 그의 종말론 속에 숨어 있는 “윤리적 의지”와 “세계의 윤리적 마지막 완성”에 대한 예수의 희망을 찾는다.

2) 영원의 종말론
① 칼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아, 종말을 역사의 마지막 사건으로 보지 않고, 현재의 순간 속에 있는 영원의 현재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모든 순간은 영원한 순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영원의 현재로 승화되어진 모든 순간 속에, 곧 “여기에 그리고 지금” 종말이 있다. 종말은 시간의 종말이 아니라, 시간의 모든 순간 속에 있는 영원의 현재를 말한다. 역사의 종말은 역사의 미래에 일어날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 속에 숨어 있는 현재의 순간 속에서 경험될 수 있다.
② 파울 알트하우스는 “모든 종말사적 종말론”을 거부하고 순간 속에서 종말을 발견한다. 세계사의 완성은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이 그 속에 숨어 잇는 현재의 순간 속에 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가치론적 종말론”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목적론적 종말론”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한다.
③ 브룬너에 의하면, 종말론적 기다림의 시간은 수학적이며 중성적 시간과 다르다. 그것은 “실존적 결단의 시간”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종말론적 기다림의 ‘곧’은 수학-천문학적 개념들로 표현될 수 없다. 이 중성적인 물(物)의 시간과 위의 실존론적 결단의 시간을 혼동할 때,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계의 종말은 묵시사상이 묘사하는 세계의 멸망이 아니라, 세계의 “완성”이며, 그것은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의 순간 속에 나타나는 “영원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3) 실존론적, 현재적 종말론


① 칼 바르트, 파울 알트하우스와 마찬가지로 불트만 역시 실존철학의 영향을 받아, 종말을 현재의 순간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신약성서가 묘사하는 종말은 고대의 신화적 세계상의 일부이며, 현대인들이 인정할 수 없는 신화적 표상들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오늘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찾아야 한다. 종말은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우주적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 신앙이냐 불신앙이냐를 결단하는 현재의 순간 속에 있다. 각 사람은 그리스도와 만나는 순간에 역사의 종말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새로운 자기 이해를 얻게 된다.
② 하인리히 오트는 종말론에서 실존론적 방법을 따른다. 그러나 시간적 과정을 순간 속으로 폐기하는 것을 반대하는 점에 있어서, 불트만과 다르다. 그는 종말론의 실존론적 방법과 목적론적 방법, 양자를 결합시키고자 시도한다.


4) 구원사적 종말론
오스카 쿨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미” 성취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종말은 이미 성취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종말은 미래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미-아직 아님”의 긴장 관계 속에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앞당겨 일어난 종말의 사건이 “시간의 중심”이다. 예수를 중심으로 구원사는 “그리스도 이전”의 시간과 “그리스도 이후”의 시간으로 구분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의 대전환이 일어났고 종말에 올 새로운 시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열려졌다. 이러한 쿨만의 종말론에는 세계사의 과정 자체가 구원의 역사와 동일시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사건은 세계사를 해석하는 “역사의 술어”이지 새로운 역사를 열어 주는 동인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5) 보편사적 종말론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성서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고대의 다른 종교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의 현현”을 통하여 일어나지 않고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일어난다. 즉, 세계사의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신적 현실의 흔적이다. 그들은 신적 현실이 흔적이라는 점에서 내적 일관성 내지 연속성을 가진다. 이를 통해 세계사는 내적 연관성을 가진 보편사가 된다. 그런데 세계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에,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세계사가 그의 마지막 곧 종말에 도달할 때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궁극적으로 완성될 “모든 역사의 종말이 예수의 운명 속에서 미리, 선취로서 일어났다.” 즉 “하나님의 신성의 보편적 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실현되지 않고, 나사렛 예수의 운명 속에서 실현되었다”. 그 안에서 모든 사건의 종말이 미리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보편사적 구도에서는 “역사의 새로움”이 인정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또한 예수의 운명 속에서 궁극적으로 일어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역사로서 일어나는 계시의 “선취” 내지 앞당겨 일어남이라면, 예수의 계시는 역사에 대하여 “새로운 것”을 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역사를 하나님이 자기 계시로 정당화시켜 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말론의 사회-정치적 기능을 간과하지 않고 정치적, 사회적 삶의 개혁에 대한 자극을 준다.


6) 메시야적 종말론
몰트만은 현대 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을 신학적 토의의 중심으로 세운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는 철저히 종말론이며, 단지 부록에 있어서만 종말론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과 조망이요 앞을 향한 지향이며 그러므로 현재의 출발과 변화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역사의 종말은 “이미-그러나 아직 아님”의 긴장 속에서 단지 시간의 미래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현재”로서 매순간 속에 현존함으로써 역사를 폐기시키는 것으로 생각되어서도 안 된다. 역사의 종말은 옛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시작되었으며 역사의 미래로부터 “오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그의 미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이다. 그의 오심과 함께 옛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되었고 부활을 통하여 시작된 미래가 곧 종말의 역사의 현재 속으로 들어와서 미래를 향하여 현재를 변화시킨다. “종말은 시간의 되어감도 아니고 무시간적 영원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와 오심이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이 오심과 함께 “새로운 것”이 일어난다. 죽은 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 창조의 미래가 옛 세계 속으로 비추이며 ‘이 시대의 고난’ 속에서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의 불을 점화시킨다. 역사의 종말은 현 세계의 폐기도 아니고, 세계의 변형도 아니며, 세계의 신격화도 아니다. 세계의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하였고 약속된 “새 하늘과 새 땅” 곧 모든 생태계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메시야적 나라의 완성이요, 이 완성은 철저히 새로운 시작이다.


7) 진화적 종말론
샤르댕에 의하면 물질은 끊임없이 나누어지는 가운데서, 모든 부분들이 완전한 일치와 조화와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중심점을 향하여 움직인다. 이러한 모든 물질들이 그것을 향해 움직이는 동인과 목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결국 세계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될 것이다(골 1:16-17; 엡 1:10). 그리스도를 향한 우주의 진화 과정은 땅의 생성-생명의 생성-정신의 생성-그리스도의 생성으로 나아간다. 인류를 향하여 점점 더 상승하는 “자연적 진화”와, 물질의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내려오심”이 예수의 성육신 안에서 만난 것처럼, 그리스도 생성을 향한 인류의 상승과 진화의 과정 속에서 우주 속으로 내려오시는 그리스도의 활동이 다시 만날 때, 그리스도의 재림 곧 두 번째 오심이 일어날 것이다. 자연과학적 지식과 기독교 신앙을 접목시키고자 한 샤르댕의 우주적 진화의 종말론은, 세계의 악의 현실 간과, 역사의 과정을 낙관적으로 보는 문제점을 가진다.


8) 해방신학의 종말론
해방신학의 종말론은 그 구조에 있어서 몰트만의 종말론과 서로 동일하다.
① 구티에레츠에 의하면, “성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약속의 책이며”, 하나님의 약속은 “종말론적 약속”이다. 또한, “종말론은 단순히 “마지막 일들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철저히 미래를 지향하는 구원사의 엔진”이요,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다. 그것은 약속된 미래를 향한 역사적 현실의 변화를 일으키며,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하고 파송한다.
② 레오나르도 보프에 의하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을 넘어선다. 세계의 절대적 미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실존 속으로 들어왔고 인간의 육 안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의 부활을 통하여 “유토피아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미래로 머물러 있으면서, 현재를 변화시키는 역동적 힘으로 작용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일어난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하나님의 미래를 앞당겨 오고자 투쟁한다. 세계의 종말은 우주적 대재난과 파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되었고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성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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