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론적으로 본 하나님 나라 고찰
1. 기독론적으로 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어휘
공관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The kingdom of God)’와 ‘하늘나라(βασιλεια των ούρανων; The kingdom of heaven)’라는 두 어휘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어휘의 공통적인 ‘나라’를 살펴 본 후에 이 두 어휘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 나라(βασιλεια)
신약에서 ‘나라’라는 단어의 의미는 ‘왕국’이나 ‘백성’보다 ‘통치’의 개념이다. 최근에 이 주제는 비평 학자들에 의하여 많은 관심이 모아졌으며, ‘βασιλεια’의 뜻으로 ‘왕국’ 혹은 ‘백성’보다 ‘왕의 능력, 권세’란 개념이 더 기본적이라는데 실제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실례로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는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βασιλεια’를 받기 위해서 먼 나라로 갔다가 돌아온 한 귀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여기서 ‘βασιλεια’는 영토나 백성이 아니며, 그 백성에 대하여 주어진 영토에서 왕으로 통치할 권세임이 명백하다.(눅 12:19) 또 이와 동일한 용법이 계시록 17:12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βασιλεια’가 나오는 모든 곳에 통치, 왕권, 주권을 대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때로는 추상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이 단어가 사용되어지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는 왕권적 권세는 그 백성을 포함하며 어떤 영역이나 영토로 표현된다. ‘βασιλεια’이 의미의 정상적인 확장은 세속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에 있어 모두 신약성서에서 발견된다. 그 예로는 마 4:8의 사탄의 시험 가운데 만국의 영광을 보여준 것과 막 6:23의 헤롯이 살로메에게 약속한 것은 통치하고 있는 모든 지역과 그것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라(βασιλεια)’는 우선적으로 주권을 뜻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 주권의 의미가 확장되어 다스리는 영토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주권자의 의도가 ‘나라(βασιλεια)’라는 단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아야 한다. 이 개념은 구약의 사상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으며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을 이룬다
2)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나라(천국)
이 두 어휘는 공관복음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태복음에 4번, 마가복음에 16번, 누가복음에 32번이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 ‘하늘 나라’는 마태복음에 30번이 사용될 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마태복음 4:17에서는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선포하심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마가복음 1:15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선포하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태복음 10:6-7에서는 예수님께서 12제자에게 ‘천국’에 대하여 가르치고 계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누가복음 6:20에는 예수님께서 12제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계시며, 마태복음 13장에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예수님께 말씀하고 계시나, 누가복음 8:11과 마가복음 4:11에서는 마태복음과 동일한 비유를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각 복음서에서 어휘가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복음서 저자들이 두 어휘에 대한 개념과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인가? 이와 같은 의문점을 가지고 이 두 어휘에 대한 의미의 차이점을 발견하고자 하는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저자들에게 있어서는 두 어휘에 대한 이해가 분명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마태복음에 사용된 ‘하나님의 나라’의 어휘가 ‘하늘나라’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 19:23-24, 개역개정
Then said Jesus unto his disciples, Verily I say unto you, That a rich man shall hardly enter into ‘the kingdom of heaven.’ And again I say unto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to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 Matthew 19:23-24, KJV
마태복음 19:23-24 말씀에서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왜 복음서 저자들은 편협된 어휘로 복음서를 저술하였을까? 이와 같은 의문점은 복음서를 저술하게 된 동기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복음서는 기록되기 이전에 케리그마를 내용으로 한 것을 이어서 저술되었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읽거나 듣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한 목적이 복음서에는 기록되어있다. 때문에 복음서가 읽혀지거나 보는 사람들에게 좀 더 친숙한 표현과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복음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흩어진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각기 독특한 복음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도 다른 어휘를 사용하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마태가 ‘하나님의 나라’의 어휘 보다 ‘하늘나라’라는 어휘를 사용한 이유는 그의 복음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저술되었으며 복음서 저자들 중 가장 유대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의 표현은 히브리어의 ‘말쿠트 샤마임(malkuth shamaim)’을 문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회피하는 고정된 유대식 언어사용과 관련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회피하는 간단한 방법 중 하나로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마태가 ‘하늘나라’ 어휘를 사용한 것은 마태 자신이 유대적인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나라’ 대신에 습관적으로 ‘하늘나라’를 사용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가나 누가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의 복음서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저술된 것이다. 오히려 유대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나라’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누가가 ‘그 나라’라고만 기록하였을 때도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유대교적 표현으로는 이와 같은 용법을 찾아 볼 수 없다. 유대교에서는 단독적으로 사용되는 나라는 당시의 통치권을 가진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이 두 어휘의 차이점은 의미의 차이가 아니라 당시의 성서를 기록한 사람의 출신이나, 그 복음서를 누구에게 보낸 것인가?에 따라 어휘의 선택을 달리하였음을 보게 된다.
2. 기독론적으로 본 ‘하나님의 나라’ 사상의 역사적 변천 과정
1)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나라’
엄밀히 말하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가장 후기의 책들 가운데 하나에서 ‘야웨의 나라(Kingdom of the Lord; malkuth YHWH)’라는 형태로 단 한번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대상 28:5).
그러나 ‘나라’라는 용어가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용된 경우는 간혹 있다. 시편 45:6; 145:11, 13에서 ‘당신의 나라’(Thy Kingdom; 개역개정, KJV, 주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시편 103:19; 145:12에서 ‘그의 나라’(his Kingdom; 한글개역, KJV, 그 정권(시편 103:19), 주의 나라(시편 145:12))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역대상 17:14에서는 ‘만군의 주’(the Lord of hosts)가 ‘내 나라’(my Kingdom)라는 말을 입에 올린다. 이상에서 언급된 표현들 모두 히브리어로는 מלכות(믈라코트)이다. 오바댜 1:21과 시편 22:28절에서 ‘나라’는 야웨의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 두 경우의 히브리어는 מלוכה(믈루카)이다. 역대상 29:11에서는 ‘여호와의 나라가 당신의 것이니’(개역개정,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라는 표현이 발견된다. 이 경우는 히브리어 ממלכה(마믈라카)이다. 다니엘서의 아람어로 쓰여진 부분 가운데 4:3, 34과 7:27에서는 ‘그의 나라’(his Kingdom; 개역개정, KJV)라는 구절이 나타난다. 이 구절들에서는 아람어는 מלכותא(말쿠타)이다. 이상에서 언급된 ‘나라’에 대한 여러 다른 히브리어 및 아람어 낱말들은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모두가 ‘왕권’, ‘주권’, ‘왕적지배’라는 개념을 기본적 의미로 갖는다
이처럼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어휘를 발견할 수 없지만, 신약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어휘가 내포하고 있는 사상의 뿌리는 구약성서에서 출발하며, 구약성서의 전체적인 흐름이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모든 선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이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기에 구약성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으로 가득차 있다.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나 ‘하늘나라’라는 어휘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피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하는 문장도 피하였기 때문이다. H. Conzelmann, op.cit.
② 이스라엘이 신정왕국이라는 사상이 구약성서 전체에 깔려있기에 굳이 이 어휘들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H. Ridderdos. op.cit., p. 40.
신을 뜻하며 자주 사용되었던 어휘는 말락 야웨(Malak YHWH)이며,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낸다. 이 통치는 이스라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심(출 15:18, 민 23:21, 신 33:5, 사 43:15)은 물론,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왕하 19:15, 사 6:5, 렘 46:18, 시 29:10; 99:1-4).
2) 묵시문학의 ‘하나님의 나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나라’나 ‘하늘나라’의 어휘가 없으나 신약시대에는 이 어휘들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친밀하게 사용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이 어휘들이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의 중간기인 묵시문학 시기에 정립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포로기 이후에는 예언활동이 점차로 사라지고, 그 뒤를 이어서 묵시문학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 묵시문학은 구약시대의 예언과 상이한 점이 많으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왕이시다”라는 사상은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구약시대에서 이스라엘이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어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언젠가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 강한 힘을 소유한 절대적인 왕이 등장하여 현실에 처해있는 정치적, 종교적 어려움들을 해결하여 하나님을 마음 놓고 섬길 수 있는 나라를 이룩한다고 하는 것이 유대인의 바람이며, 또한 그와 같은 믿음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 가운데 이와 같은 소망이 사라지자 예언자들의 외침은 호소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사상도 바뀌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들의 민족 가운데 왕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자를 통하여 임한다고 하는 생각에서 현실의 역사를 포기한 역사 밖에서 강권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왕국이 지상의 팔레스틴 지역에서 회복되리라는 종래의 사상을 바꾸어 장차 앞으로 올 ‘하나님의 나라’는 초자연적인 특성을 가지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행하시는 일이기에 현실의 역사적 발전이 아니라 갑자기 이 현실 가운데로 임하는 것이기에 현실 세계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사상의 변화는 이전까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강대국인 바벨론이나 이집트를 이 세대 속에서 이스라엘의 적이라고 간주하여 그들과 현실적인 투쟁을 행하던 것을 중단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강대국이 적이 아니라 강대국들을 주관하는 사단이 적이라고 판단하였고 이를 물리치는 것은 현실적인 투쟁이 아니라 영적인 투쟁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묵시문학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사상의 변천은 현실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였다. 즉 현실은 악의 세력에 의하여 재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묵시문학가들은 현실에 희망을 가질 수가 없으며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사상이 묵시문학 전체에 일관되어 흐르며 기록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약시대의 사상을 전통적으로 그대로 담아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과 다윗의 집이 다시금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작품도 있다. 또 이 세상에 마지막 세대의 메시야가 통치한 후에 초역사적인 메시야가 나타나 새로운 천상의 세계가 된다고 하는 과도기적인 사상을 지닌 작품도 있다. 바룩의 묵시록, 제 4 에스드라서.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의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고 있으나 묵시문학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어떤 인간의 노력도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 있는 것이다. 묵시문학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사상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묵시문학은 이스라엘 민족이 암울한 역사의 현실 속에 있을 때 미래에 대한 밝은 소망을 주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3) 예수님 시대의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이 출생할 때의 팔레스틴 지역은 매울 혼란을 겪고 있었던 곳이였다. 당시의 강대국 로마는 급기야 팔레스틴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고수하고 있던 팔레스틴 지역은 쉽게 헬라의 문화에 동화되지 아니하였다. 물론 외형적인 건축물 등은 헬라화 되어 갔지만 내면적인 의식과 관습 그리고 가정제도 등 에서는 자신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로마의 융화 정책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헬라 문화가 사유 재산 제도를 기본으로 하는 개인주의적인 문화인 반면에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는 공납제 생활양식(atributary model of production)의 문화로 촌락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상이한 문화의 양식 가운데 이 지역을 통치하는 사람은 많은 갈등을 하여야 하였다. 무조건적으로 헬라 문화를 이식하고자 하였던 통치자와 전통을 지키려는 유대인들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원전 2세기 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무리한 개혁을 단행하다가 마카베오 형제와 그의 후계자들이 단합하여 민란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때로는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를 잘 이해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의 유대인들로부터 합법성을 인정받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헤로데이다. 그는 무력과 공포로 통치를 하여 부를 축적하는 한편, 큰 성전을 건축하였기에 유대인들로부터 어느 정도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혼란의 시기에 유대인 안에서도 이 혼란에 대처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첫째가 엣세네파이다. 이들의 지대한 관심사는 성전 정화에 있었다. 이들은 부당한 사제직에 의하여 성전이 더렵혀졌다고 단정하고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민족적 생활과 성전 생활을 떠나 공동체 생활을 하며, 기도와 성서 연구에 치중하였다. 이와 같은 생활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준비라고 이들은 생각 하였다. 다음은 사두개파 사람들로 이들은 로마와의 타협을 모색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로마에서 파견하는 관리들의 행정적인 조처들을 인정하고 지지하였다. 이들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 세상으로 오는 것이며, 현실의 이스라엘을 통한 도래였다. 다음은 바리새파 사람들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백성들을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유대인들은 구약적 배경의 ‘하나님의 나라’의 사상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묵시문학적 입장에서는 초자연적인 인물을 통하여 인간역사 가운데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었다. 현실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전혀 다른 차원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에 매우 큰 관심과 희망을 표시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현실의 역사를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선하여 현실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일으키기를 유대인들은 원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이와 같은 두 개의 사상이 양립되어 있었으며 사상적인 정리가 되지 않는 혼란의 시기였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이 두 가지를 모두 기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전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요 7:26-27에, 후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마 2:5 ; 21:9 ; 22:4, 요 7:40-42에 기록되어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실 때의 환호성으로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에 복이 있도다,”(막 11:10)고 외친 사실과 유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기에 조롱의 어구로 십자가 위의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한 사실은 당시의 유대인들은 후자의 모습을 더 많이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상의 변천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종합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사상은 이스라엘이 왕정이 시작되기 이전인 신정정치 시대까지 거슬려 올라간다. 이때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상보다는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이 더욱 강조되었던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통치는 어느 한 국가만을 그 영역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을 영역으로 하는 것에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통치가 왕정으로 넘어오면서 이 사상이 이스라엘 국가의 이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바뀐 사상을 계속하여 전통적인 사상으로 후세에 전달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강성함을 기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윗의 왕조의 몰락은 ‘하나님의 나라’사상에 일대의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것은 세상적인 인간의 힘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묵시문학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다른 방법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국가적인 도래가 아니라, 개인적인 의로 말미암아 참여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도 국가적인 구원이 아니라 개인의 의에 의한 것임을 밝히 말하고 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가 우주적임을 밝히는 것이다. 묵시문학에서는 이방인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상의 변화는 이스라엘의 민족의 개념을 바꾸었다. 예수님 시대에는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인 혼란기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상도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시기였다. 전통적인 국가의 이념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가 하면 묵시문학에서 새롭게 등장한 개인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무리들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3. 기독론적으로 본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몇 가지 견해
1) 구자유주의자들의 견해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하르낙(Harnack)이다. 그는 「기독교란 무엇인가?」(What is Christianity?)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단순히 예수님이 가르친 ‘순수한 예언자적 종교’로 이해했다. 즉 하나님의 부성, 인류의 형제애, 개인 영혼의 무한한 가치 및 사랑의 윤리로 보았다. 또 어떤 이들은 개개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로 보았다.
2) 철저한 종말론적 견해
1892년 요하네스 바이즈(Johannes Weiss)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The preaching of Jesus about the kingdom of God)이란 책에서 미래 종말론적 견해를 피력했다. 그 후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이것을 좀 더 체계화시켜 그의 유명한 철저한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을 전개하였다. 철저한 종말론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철저하게 미래적인 면으로 보는 견해로서 이들은 예수님을 묵시문학적 배경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독교 역사의 처음 2세기 동안 교부들 사이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G. E. Ladd는 “전형적인 종말론적 문구가 디다케(διδακη)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성도들의 신앙교육을 위하여 기록한 교육도서.
에서 발견되는데 그곳에 – 주여, 당신의 교회를 기억하사 사면으로부터 당신을 위하여 예비하신 당신의 나라로 거룩함 가운데 불러 모으소서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불러 모으소서의 기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경험될 미래적 축복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
3) 실현된 종말론
그러나 도드(C. H. Dodd)는 그의 「예수님의 비유」 연구에서 천국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보는 새로운 견해를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간과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1970년 「기독교의 창시자」(The Founder of Christianity)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아직 역사의 저편(beyond history)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 후 예레미야스(Jeremias)는 이 둘을 종합하여 ‘실현 과정에 있는 종말론’(Eschatology in the process of realization)을 주장했다.
4) 실존적 종말론
본래 종말론이란 말세에 있을 일들에 관한 연구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불트만(R. Bultmann)이 현재적인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왔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단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위에서부터 밑으로 내려온다고 하였다.
4. 기독론적으로 본 ‘하나님의 나라’ 결론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는 로마서 14:17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고,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 평안을 가지고, 인생의 모든 역경을 이기고 창조적인 삶을 살게 하는 기쁨으로 미래의 천국을 현재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참고서적
신성종 「신약신학」(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1)
이상훈 「신약개론」(부천: 서울신학대학출판부, 1981)
조용기 「10분 설교」(서울: 서울말씀사, 2008)
기독교대백과사전 제15권 기독교문사
윌리암 바클리, 「예수의 사상과 생애」 정용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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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E. Ladd, 「하나님의 나라」
G. E. Ladd,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서들」 신성종, (서울: 성광문화사, 1982)
Hans Conzelmann, 「신약성서 신학」김철손 외 2인,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2)
Herman Ridderbos,「하나님의 나라」오광만, (서울: 엠마오, 1989)
J. Bright, 「하나님의 나라」김철손, (서울: 컨콜디아사, 1987)
Kettel, “왕, 왕권“ 고영민, 「월간목회」 1990년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