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적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사역

▶ 기독론적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사역

○ 기독론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사역 목적과 방법

①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은 신의 계시, 신인간(神人間)의 중보, 인류의 구원 그리고 우주의 통치이다. 계시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것은 신지식(神知識), 인간의 자아 지식 그리고 자연과 역사의 본질에 대한 지식이다. 브루너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중보자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성육신하셨다, 성육신이란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양자를 중보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원수 관계는 자녀관계로 회복되었다.


② 그리스도의 사역의 방법은 성육신한 자, 예언자, 제사장, 고난의 종 그리고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이다.


③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실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고후 5:14-6:2 ; 롬 5:1-11 ; 엡 2:11-22), 성도의 공동체(하나님의 새 백성, 하나님의 종말론적 가족: 마 23:9 ; 막 3:34,35 ; 마 25:40)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마 10:7 ; 마 12:28 ; 눅 10:9,11)이다.

1. 기독론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 사역의 목적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세 가지 직분들(Offices)로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분류했으나(Calvin), 현재에 이르러서는 예수의 다양한 모습의 사역을 이렇게 분류하지 않는다.
최근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직분들”이란 용어를 망설이는데 개신교 스콜라주의에서 그 직분들을 서로 첨예하게 구별하거나 고립시켜 보는 경향 때문이다. 직분의 개념이 때때로 지나치게 공식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져 왔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의 역동적이고 인격적인 특성이 흐려진다는 것이다. 예수는 기름부음 받은 자였기에 기름부음 받은 역할(들)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사역의 세 가지 면 모두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1.1. 그리스도의 계시 역할

그리스도의 계시하는 사역은 광범위한 시간과 형식들을 포함하고 있다.


①그는 성육신 이전에도 계시의 양식으로서 역할하였다. 로고스로서 구약의 선지자의 메시지를 통해 이미 일하고 계셨다.
②가장 분명한 기간은 그의 성육신인데 지상에 머무는 동안의 선지자적 사역이다. 그는 본성의 참 형상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기에 그가 한 행동은 단순한 전달이 아닌 진리와 하나님의 실재를 밖으로 보여준 것이다.
③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한 그의 계속적인 계시사역이 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이 성령에 의해 지속되고 완성될 것임을 드러내셨고 사실 성령을 통해 자신의 계시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또 사도들이 진리를 선포할 때이다.
④가장 완전한 예수의 계시사역은 미래에 놓여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단어들 중 하나가 “계시”이고 그때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이 제거될 것이다.

1.2. 그리스도의 통치

복음서는 예수를 왕, 통치자로 이사야는 다윗의 보좌에 앉을 미래의 통치자로(사9:7),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고(히1:8) 예수 자신도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마19:28)과 하늘나라가 자 신의 것임을 선언하였다.(마13:41)
그런데 예수의 통치를 거의 미래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오늘날 예수는 자연적 우주를 통치한다.(요1:3, 골1:17) 또한 그의 통치가 교회에 현존한다. 왜냐면 그는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골1:18) 그리고 그의 통치나라는 제자들의 마음가운데 있어서 오늘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주되심 을 따르는 곳은 어디나 그의 지배, 왕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가 오실 때 완전해질 것이다.

1.3.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

대표적으로 그의 중보사역으로 요 17장의 기도에서 볼 수 있듯 지상에 있을 동안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하늘에 있는 동안에 모든 신자들을 위해 중보하신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 모든 신자들을 하나님앞에서 의롭게 하신다.

2. 기독론적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사역 방법: 사역의 단계들

2.1. 비하

2.1.1. 성육신


예수가 지상에 오면서 포기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지상에서 그것들 중 어느 것도 갖지 않으셨다. 그러나 모든 의미에서 그는 왕자였다. 그가 온 것은 가장 높은 인간적 환경이 아니라 가장 초라하고 낮은 환경이셨다. 또 율법의 주인인 그가 율법아래 태어나 다 이행하셨다.


① 주님 자신의 신적속성을 포기하셨다.
사실 그는 하나님이기를 그만두고 하나님으로부터 변하였다. 성육신이라기보다 변형에 해당된다. 그러나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의 그의 신성에 대한 다양한 긍정들에 모순된다.
② 주님은 신성의 일부 – 자연적 속성, 상대적 속성 중 하나 – 를 포기하셨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됨을 그만두지 않고서 그의 신적속성의 일부를 어떻게 실제적으로 포기 할 수 있었는지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③ 예수는 그의 신적속성의 독립된 실행을 포기하셨다.
이것은 그의 신적속성의 일부(전부)를 포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그것들을 실행할 능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 그는 많은 신적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자 신의 신적속성을 발휘하기 위해 아버지와의 의지와 그의 필연적이었다.
④ 그리스도는 그의 신적속성의 사용을 포기하였다.
이것은 예수가 신적속성과 독립적으로 발휘할 수 있으나 활용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 하는데 그러면 아버지에 대한 그의 기도와 분명한 의존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⑤ 예수가 여전히 신적속성을 소유했지만, 마치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셨다.
그렇다면 그가 재림시기를 모른다고 한 진술은 허위나 철저한 부정직의 죄를 지은 것인가?
여기서 ③번의 견해가 전체자료와 가장 잘 조화를 이룬다. 비하는 인간성의 모든 조건을 수반했다. 그는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서 완전한 인간됨에 따르는 영혼의 비탄을 경험하였다.

2.1.2. 죽음(Death)


① 비하의 종국은 그의 죽음이었는데 생명의 창조자요 제공자이신 그분이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신 것이다. 죽음은 죄의 값인데 죄없는 분이 죽은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들에게 굴육적인 일까지 당하셨다. 죄와 악의 능력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실패한 것 같았다. 제자들은 좌절하여 흩어졌다.
②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이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인 동시에 그의 나라를 세움과 결합되어 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참 흔적은 십자가에 있으며 그것은 동시에 사랑의 계시이며 하나님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 참 신학과 하나님 인식이 있다”고 말한다.

2.1.3. 음부로 내려감


어떤 신학자들은 비하의 다른 단계가 지옥(Hell) 혹은 음부(Hades)로 내려갔음을 언급하는데 이견이 많다. 왜냐면 분명하고 명확한 단일한 성경본문이 없다는 사실이다.


①시편 16:10
이것은 지옥으로부터가 아닌 단순히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언급이다. 즉 죽음이 예수를 영원히 지배하는 힘을 갖지 않음을 진술하는 것이다.
②에베소서 4:8-10
9절의 “땅”은 단순한 “아래 곳”으로 이해하여 그는 우주의 낮은 지역 곧 땅으로 내려오셨다는 의미이다.
③데모데전서 3:16
“천사들에게 보이시고”라는 의미가 예수가 지옥에 내려가 마귀에게 보였다는 의미보다 하나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셨다는 중요한 사실에 대한 지상과 천상의 증인목록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이 더 잘 조화를 이룬다.
④베드로전서 3:18-19
a.로마 카톨릭의 견해
예수가 죽은 성도들의 거주지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그곳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었다는 해 석이다.
b.루터교의 견해 : 예수가 음부에 내려갔지만, 복음을 선포함이 아닌 사탄에 대한 그의 승리를 선언하고 완전하게 하며 죄를 선고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c.영국 성공회의 견해
예수는 음부 곧 낙원이라는 곳에 가서 의로운 자들에게 지리를 더 완전하게 설명하였다는 해석이다.
이것 중 어느 하나 적절하지 않는데 a.는 두 번째 기회라는 사고가 성경의 어느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고 b.에서 “설교하다”는 의미는 성경에서 시종일관 복음선포를 지칭하는데 여기는 심판의 선언을 지칭하고 있다. c.는 낙원에 있는 의인들을 “옥에 있는 영들”로 묘사한 이유가 어렵다. 한 가지 가능성은 이 구절을 20절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인데 예수는 노아를 통한 그 동일한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마음에 두지 못하였고 결국 파멸하였다. 영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신 것이 시간적 연속이라는 표시가 없음에 주목하자.
⑤베드로전서 4:4-6
6절에서 이미 죽은 자들이나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의 메시지가 선포된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결론지어서 이 문제에 대해 독단적으로 않은 것이 최선이다.

2.2. 승귀

2.2.1. 부활


부활이 죽음을 주는 것이 죄와 죄의 권세가 그리스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심한 것이고 죽음이 그를 붙잡을 수 없음에서 그의 승리의 완전성이 상징화되기에 중요하다.
부활의 두 가지 유형의 증거는 ①예수의 무덤이 비었고 시체가 결코 제시되지 않았다. ②여러 사람 들이 예수가 살아있는 것을 보았음을 증언하였다.
또 한 부활한 육체의 성질인데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했지만, 부활 후 예수는 음식을 먹었고 그의 창과 못자국으로 그가 여전히 물질적 육체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데 이런 모순가운데서 아직 그가 승천하지 아니한 부활의 상태에 있음을 알아야한다. 그가 승천할 때는 또다시 완전한 변화를 겪을 것이다. 부활이 주로 물질적인 사실로만 간주되어서는 안되고 죄와 죽음에 대한 예수의 승리이다.

2.2.2. 승천과 아버지의 우편에 앉음

승귀의 두 번째 단계는 지상을 떠나 아버지와 함께하는 그의 위치를 다시 취하는 것을 포함한다. 통상 승천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행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지리학적이지 아니하고 차원의 변화뿐만 아니라 상태의 변화도 요구된다. 승천할 때 예수는 그의 몸의 부활과 함께 시작된 변형의 나머지를 겪었다. 승천의 중요성은 그가 이 지상에서의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더 이상 당하지 않고 이전보다 더 큰 영광과 아버지의 직접적인 임재로 대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앞으로 영화롭게 될 인성보다 더 완전하시고 그의 계속적인 성육신은 그 신성에 어떤 제한도 가하지 않는다.

예수가 지상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①우리가 앞으로 거처할 장소를 예비하기 위해서이다.(요14:2-3)
②삼위일체의 제3위격인 성령이 와야했기 때문이다.(요16:7)
성령은 그들 안에서 일할 수 있고 그들의 삶의 중심에 더 친밀하게 다가감으로써 그는 더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예수가 한일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수의 승천은 그가 아버지의 우편에 앉았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휴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른손이 영예와 능력의 자리이기에 그것은 권위와 적극적인 통치의 상징인 것이다. 또 우리를 위 해 간구하는 곳이다.(히7:25)

2.2.3. 재림

성경은 그리스도가 미래의 어떤 시점에 다시 올 것을 명확히 말하는데 그때에는 그의 승리가 완전해지며 만물의 심판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무릎을 꿇고 절하며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것이다.(빌2:10-11)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