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 바울의 기독론에 기원과 내용
○ 들어가는 말
사도 바울은 이 땅에 살았던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수의 훼방자요 핍박 자였던 그가 변화되어 이방인의 사도라 일컬음을 받고 그의 전 생애를 바쳐 기독교에 헌신하게 되기까지 그가 갖고 있는 사상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알아봄으로써 올바른 기독 교관을 세우고 우리의 신앙 자세를 확고히 다져나가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 바울의 기독론의 기원과 내용
1) 바울과 기독론의 기원 : 역사적 예수
바울은 사도행전 21:39과 22:3에 근거해 팔레스틴 유대 본토가 아니라 길리기아 지역에 위치한 대학 교육 도시인 다소에서 다소성의 시민으로, 그가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자로 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베냐민 지파의 후손이며, 바리새인인 뼈대 있는 유대인 이민자 가정(디아스포라)에서 출생했다.
바울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가르치고 전파했는가? 바울은 다메섹 사건 이전에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었는가? (바울이 주후 6년경 출생했다면. 바울의 생애 연대기 문제에 관해서는 John Knox, Chapters in a Life of Paul (Macon::Mercer University Press, 1987): 72-409. 그리고 예수님이 주전 4년경에 출생했다면. 역사적 예수의 생애 연대 문제에 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John P, Meier, Achronolgy of Jesus’ Life, in A Marginal Jew .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 (New York: Doubleday . 1991))
바울과 예수님과의 나이 차이는 불과 10살 정도밖에 안 된다. 바울이 12세 때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유학 와서 계속해서 예루살렘에 거주했다면 복음서의 증언대로 예수님께서 30세 때 자신의 거주지인 갈릴리에서 그의 공적 사역을 시작 했다면 3년 동안의 공 사역동안 예루살렘을 여러 번 방문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전파했을 것이고 바울은 생전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예수님이 당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정치 , 종교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 유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로마 군인들과 성전 헌병대들에 의해 체포되어 십자가형을 당했을 때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예루살렘이나 혹은 다른 지역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Johannes Weiss, Paul and Jesus, trans, H, J Chaytor (New York: harper, 1909) p.39-56 참고) 바울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었으며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바울이 초대 예루살렘 교회 형성 때부터 기독교인 박해에 앞장섰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바울의 인지가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부터였다고 단정 짓지 못하게 한다. 당대 누구보다도 유대 종교와 민족의 정체성 보존에 열심을 품었던 엘리트 청년 바울이 이미 그 당시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위험 인물로 간주되던 예수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부터 이미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사실상 누가가 바울이 초대교회 신자들을 핍박한 것을 예수님 자신에 대한 핍박과 동일시하는 것은 바울이 이미 십자가 사건 이전부터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사건 이전에 예수님에 대해 품었던 생각들은 이미 초대 교회가 형성되기 전부터 부분적으로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최 갑종, 바울/ 사울의 역사적 자리, 바울 연구 p28-41).
바리새인인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모두 거짓된 것으로 보였다. 또한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유대교에 심히 위협적으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특별히 스데반을 중심으로 한 헬라게 유대인에 도전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분노를 늦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메섹사건은 예수님과 초대교회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180도로 바꾸어 놓았다. 초대 신자 간에 시작되었던 은혜의 역사가 동일하게 바울 자신의 경험에도 일치되는데 이것이 바울의 기독론의 출발점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복음을 무엇보다도 먼저 기독론 적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갈 1:12,16)’,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고후 4:4) 또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 (엡 3:8)이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 적 선포의 주제는 ‘주’이며(고후 4:5), ‘하나님의 아들’(갈 1:16;고후 2:19)인, 십자가에 못 박히고(고전 1:23) 부활한(고전 15:12)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울이 복음에 의거하여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로마서 1:2-4과 고린도전서 15:3-5에 있는 바울의 복음의 기독론 적 정의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가 인간과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체현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메시아 시대의 약속하신 구원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다메섹 사건은 바울로 하여금 나사렛 예수에 대한 핍박에서 떠나 오히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구세주로 증거 하도록 했고 또한 전에 그가 거짓된 무리로 간주하여 핍박하고 죽이려 했던 초대교회 신자들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백성이요 구원의 공동체요 새 언약의 성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그는 당시 유대인들의 정체성의 근거이자 구원의 수단으로 까지 신봉되던 율법과 성전이 하나님이 세우신 진정한 구원의 수단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보내신 메시야이며 유대인은 물론 온 세상 사람들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바울의 회심 장면은 신약 성경에 네 번이나 나타날 뿐 만 아니라 바울의 ‘율법 종교에 대한 환멸, 초대 신자들의 정신적 충격, 또 직. 간접적으로 자기에게 임해오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인상들’ 이 모든 일들은 어떤 분명하고도 우연한 격변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한 것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다메섹에서의 회심은 신학적으로도 아주 크고 획기적인 사건으로 의미가 있다.
2) 바울의 기독론의 내용 : 바울 서신에 나타난 예수의 사역과 교훈
그러나 바울 신학이 그의 다메섹 경험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바울이 다메섹의 계시에서 그의 서신에 나타난 바 그의 전 신학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신학의 주류의 기원이 그 근본적인 사건에 있다는 것이다.
M. Hegel은 바울이 그의 초기 서신에서 마지막 서신에 이르기까지 그의 기독론의 본질은 발전하지 않고 있으며, 반대로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교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의 기독 론 적 칭호들, 형식 그리고 기독론 적 관점들을 전제하고 있음을 관찰하였다. 이것은 곧 이런 기적 요소들이 그 교회를 세운 바울의 선교 적 설교에 귀속됨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Hegel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서방을 향한 대 선교 여행이 시작되기 전인 40년대 말에 이미 바울의 기독론은 그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 충분히 발전되어 있던 상태였다.’ (M. Hegel, “Christologie und neutamamentliche Chronologie: zu einer Aporie in der Gechichte des Urchristentums”, Neues Testament und Geschichte, Cullmann FS(1972), p45. C.K. Barrett, Frome First Adam to Last(1962), p.3. Barrett는 한결음 더 나아가 심지어 이렇게까지 주장한다)
“…우리는 바울이 1세기의 40년대, 50년대, 60년대에-여기서 우리는 30년대도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그분(즉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아는데, 바울은 그의 회심과 그의 서신서를 처음 쓸 당시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그의 견해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조금도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강조는 Barrett의 것)
마찬가지로 본질상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와 함께 바울의 구원론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가졌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나사렛 예수의 활동과 말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까? 사실상 우리에게 13서신에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말씀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바울 서신은 바울 복음의 주 내용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케류그마를 제외하고는 역사적 예수님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암시를 찾기 힘들다. 간접적인 언급은 매우 많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김세윤 교수의 바울 서신들에 있는 예수 전승, 예수와 바울을 연구)
바울의 서신들에는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중심적인 메시지인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과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이적들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바울이 가끔 그의 서신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설명 없이 사용하는 것은 롬 4:17, 고전 4:20, 갈 5:21, 살전 2:12, 살후 1:5 등 바울 자신을 포함하여 수신자들이 이미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승을 알고 있었다고 간주하게 한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주로 하나님을 선포했는데 바울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온 인류를 위한 구원 사건으로 선포했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의 선포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역사적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신약 신학의 전제일 뿐 내용은 아니라고 보고 그의 신약 신학에서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거의 취급하지 않는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R. Bultmann은 고린도후서 5:16에 나오는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는 진술에 근거해,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의 선포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역사적 예수의 삶과 그의 교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단정한다. Bultmann, 2 Corinthians,312-13; The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1, 238-39. Bultmann은 5:16절에 있는 ‘육체에 다른’이란 말을 동사에 연결시키지 않고 명사‘그리스도’에 연결시켜, 본문을 “비록 우리가 육체에 다른 그리스도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더 이상 육체에 다른 그리스도는 알지 아니하노라”로 번역한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과 대다수의 영어 번역처럼(NIV, NRSV),’육체에 따른‘이란 말은 명사가 아닌 동사에 연결시켜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은 불트만의 본문 이해를 따르지 않는다. (참고, Wolff, “True Apostolic Kowledge of christ: exegetical Reflections 2 corinthians 5.14ff”, in Paul and Jesus, ed. Wedderbun, 81-98; Dun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184-185.)
바울의 모든 서신들은 전문가들의 주장처럼 이미 예수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잘 알고 있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나 혹은 바울 자신의 후계자들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다. 바울 서신들은 로마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울이 직접 설립했거나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교회나 개인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등은 모두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이며, 디모데후서, 디도서 등은 바울을 대신하여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들에게 보낸 편지이며 빌레몬서는 바울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다.
이 모든 편지들은 예수님의 전승을 교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름 그대로 수신자들이나 바울 자신의 특수한 역사적 정황과 필요성에 의해 쓰여 졌다(Contingency-상황성). 또한 그의 서신들은 일관된 생각들이 내포돼 있다(Coherence-일관성, 통일성).
바울의 서신 가운데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들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바울이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들을 전혀 알지 못했거나 관심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바울의 서신들은 자세히 검토해보면 우리는 그 서신들 가운데서 바울이 자신이 세운 교회에게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들을 전달했음을 보여주는 구절들이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했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휘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 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분명히 예수님의 사역을 총체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갈 1:18절에 따르면 바울은 다메섹 사건이 있은 지 3년 뒤에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베드로와 15일 함께 거했고 그 15일 동안에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도 만났다.
바울은 베드로를 만나기 전 3년 동안 이미 아라비아와 다메섹 지역에서 자신이 받은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다.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약을 통해 약속되었던 그리스도시라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와 죄 아래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속죄적, 대속적, 종말론 적인 죽음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를 부활시키실 것임을 보여주는 첫 열매이자 종말론적인 부활이며 따라서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 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이신 칭의 교리를 증거 했다.
*참고 자료
-바울의 생애 연대기 문제에 관해서는 John Knox, Chapters in a Life of Paul (Macon::Mercer University Press, 1987): 72-409
-역사적 예수의 생애 연대 문제에 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John P, Meier, Achronolgy of Jesus’ Life, in A Marginal Jew .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 (New York: Doubleday . 1991)
-Johannes Weiss, Paul and Jesus, trans, H, J Chaytor (New York: harper, 1909) p39-56. 바울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었으며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최갑종, 바울/ 사울의 역사적 자리 , (바울 연구2)28-41.
-M. Hegel, “Christologie und neutamamentliche Chronologie: zu einer Aporie in der Gechichte des Urchristentums”, Neues Testament und Geschichte, Cullmann FS(1972), p45. C.K. Barrett, Frome First Adam to Last(1962), p.3. Barrett는 한결음 더 나아가 심지어 이렇게까지 주장한다: “…우리는 바울이 1세기의 40년대, 50년대, 60년대에-여기서 우리는 30년대도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그분(즉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아는데, 바울은 그의 회심과 그의 서신서를 처음 쓸 당시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그의 견해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조금도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강조는 Barrett의 것)
-바울이 가끔 그의 서신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설명 없이 사용하는 것은 롬 4:17, 고전 4:20, 갈 5:21, 살전 2:12: 살후 1:5 바울 자신을 포함하여 수신자들이 이미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승을 알고 있었다고 간주하게 한다.
-Bultmann, 2 Corinthians,312-13; The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1, 238-39. Bultmann은 5:16절에 있는 ‘육체에 다른’이란 말을 동사에 연결시키지 않고 명사‘그리스도’에 연결시켜, 본문을 “비록 우리가 육체에 다른 그리스도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더 이상 육체에 다른 그리스도는 알지 아니하노라”로 번역한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과 대다수의 영어 번역처럼(NIV, NRSV),’육체에 따른‘이란 말은 명사가 아닌 동사에 연결시켜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은 불트만의 본문 이해를 따르지 않는다. 참고, Wolff, “True Apostolic Kowledge of christ: exegetical Reflections 2 corinthians 5.14ff”, in Paul and Jesus, ed. Wedderbun, 81-98; Dun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184-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