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노시스 이론의 역사적 배경과 케노시스 기독론에 대한 고찰
○ 들어가는 말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예수께서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인간이라는 결론이 내려 졌지만, 여전히 커다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라는 한 위격 안에 존재하는 신성과 인성, 이 두 본질들 사이의 관계 때문이다.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는 지식과 능력이 무한한 존재시다. 그가 하나님이시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그의 능력에 적절한 대상들인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어느 곳에서든 계실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가 인간이라면 제한된 지식을 가진다. 그는 모든 일을 할 수도 없고 한 번에 한 장소에만 있을 수 있는 제한 된 존재이다. 한 위격이 동시에 무한한 한편 또한 동시에 한정적이기는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이루어져 왔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케노시스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이론은 한 인격 안의 존재하는 두 본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앞으로 본고를 통해 그 내용과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케노시스 이론의 역사적 배경
1) 루터주의 신학
케노시스 기독론이 본격적으로 그 신학적 발전을 이룩하기 전의 그 모태적 신학 흐름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루터의 신학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루터주의 신학은 케노시스 기독론의 발흥이 갖는 그 기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루터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삶이 철저하게 역사적 예수 안에 감싸져 있다는 개념을 기본적으로 생각해왔기에 루터주의 신학은 영광스러운 성자가 어떻게 동시에 인간 예수일 수 있는가를 숙고하였다.
루터는 예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을 서로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루터는 결론 내리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섬기기 위해” 자신의 신적인 영광을 비우시거나 “그 영광이 드러나지 않게 자제시키거나”하는 행동을 통해 인간으로서 살아가셨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루터의 이해는 그리스도가 지상 생활 중 ‘하나님의 형태’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신의 속성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는지 아니면 속성을 모두 포기하였는지에 대한 이슈를 만들게 되었다.
2) 요한 브렌츠와 튜빙겐 학파
루터의 계승자 중 하나인 요한 브렌츠(Johann Brentz, 1499-1570)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의 속성을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 생활 가운데 실제로 이것들을 사용하셨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원리 아래 그리스도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하면서 사실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편재하실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케노시스’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편재성 자체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신의 속성을 사용하였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삼위일체의 제 2위격으로서, 강보에 뉘었을 때나 무덤 속에 있었을 때나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세계를 여전히 지배하였다고 주장한다.
브렌츠를 따르는 튜빙겐 학파 신학자들 역시 예수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인성 가운데에서도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감추어진 형태로 편재할 수 있으며 전능하고 전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튜빙겐 신학자의 이론에 따르면 말 그대로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심(Kenosis)이 없게 되며, 단지 감추임(Krypsis)만 있을 뿐이다. 이 견해 주장하는 바, 인성에 의해 그리스도가 수치의 상태에 머무는 동안에도 역시, 오로지 비밀리에 인간이 인식할 수 없도록 신적인 지배가 행사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튜빙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가 종의 형태를 취하신 모습과 인간이 갖고 있는 결함을 취하셨음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견해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인간의 본질을 위협하고 말았다.
3) 마틴 켐니츠(Martin Chemnitz)와 기센 학파
루터의 또 다른 계승자인 마틴 켐니츠는 그리스도의 케노시스와 관련하여 브렌츠와 다른 견해를 피력하였다. 켐니츠는 브렌츠와 정반대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케노시스라는 행동을 통해 신의 속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매우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하나 됨’이 어떻게 확보되었는가에 대해 양성 각각의 안에 있는 본질적 속성들을 유지시키는 방식으로 제한시켰는데, 이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보존됨을 밝혔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인성이 감추어진다거나 사라지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하나 됨의 개념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확고히 다져지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켐니츠에게는 실제의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사실 때든지 하늘의 영광가운데 사실 때든지 편재하실 수 없으며 이는 바로 그가 인간의 속성에 메여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적인 본질은 결코 잃어 버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실제의 인체를 가지고 있었어도 한 인격 안에 신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속성의 교류 개념을 사용한다. 이것은 “신성을 그 기관으로 하고 신성의 힘을 인성 안에서, 인성을 통하여 그리고 인성과 함께 역사하게 하면서 신적인 것들이 인간의 성질에 침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양성의 연합은 ‘본체들’의 연합이라기보다는 각각 자기의 의지를 갖는 실존적 연합이라 여겨져야 한다.
브르스는 이러한 켐니츠의 견해를 평가하기를 “그의 특징적인 교리는 그리스도가 그의 전체의 인격 가운데에서 어디에든 계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언제 어디에서든 계실 수 있으며 원하는 바대로 심지어는 아무도 볼 수 없는 형태로도 계실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켐니츠는 그리스도가 지상에 사시는 동안 전능, 전지, 편재성과 같은 신의 속성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케노시스는 바로 그리스도가 모든 신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미와 다름이 없다 하겠다.
켐니츠의 주장을 따르는 기센 신학자들은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편재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신적인 속성들은 위격적 연합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제거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신적인 속성들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위격적인 연합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신적인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었다.
이들은 ‘위격적인 연합’을 ‘신적인 속성들이 예수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로만 한정하였다. 즉 예수가 신적 속성을 사용한 것은 그의 인성 안에서가 아닌 그의 신성 가운데에서 신적인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리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그 어떤 신적인 속성들을 사용하지 않기로 작성할 때에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신적인 속성들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19세기 케노시스 기독론의 발흥
19세기의 신학자들은 칼케돈 기도론으로부터 자유로왔다. 이들은 합리주의의 지배아래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예수는 단지 종교적인 천재 혹은 혁명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토마시우스(Gottfried Thomasius, 1802-73)를 포함한 여러 신학자들은 이러한 현대의 신학 흐름에 대항하고 정통 기독론을 방어할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이들은 케노시스 개념이라 말로 ‘역사적 예수 탐구’에 의한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데 유용할 것이라고 믿고 이 개념을 통해 역사적 예수가 실제의 한 인간이면서도 동시에 유대의 한 인간 이상의 인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증명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케노시스 기독론에 대한 고찰
1) 케노시스 이론
“한 위격 속의 두 본질”의 신앙 공식을 설명하기 위해 , 칼세돈 공의회 이후로 있어 왔던 이 결합에 대해 이해하려는 몇몇 시도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네 가지 시도들이 있었는데, 첫째,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 되었다는 사상(양자론), 둘째, 신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이 개인적인 인격이 아닌 무인격적 인성을 취하였다는 사상(무인격적 인성론), 셋째,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이 그의 신성을 인성으로 바꾸었다는 사상(케노시스 이론) 그리고 넷째, 성육신이 인간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상(역동적 성육신 이론) 등이다.
근대의 기간 동안 두 본질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뚜렷한 시도가 나타났다. 특히 19세기에 들어 성육신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빌립보서 2:7의 “(예수께서) 자신을 비우셨다”의 표현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제안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예수께서 자신을 비우셨을 때 그 비우신 것이 하나님의 본체(6절)라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제 2위격이 그 의 뚜렷한 신의 속성(전능함, 전지함, 편재함 등)을 버리셨고, 대신에 인간의 특성을 취하셨다.
케노시스 이론의 주요 형태들은 다음과 같다.
-토마시우스(Thomasius) : 그리스도가 성육하시면서 전능과 전지와 같은 신성의 상대적 속성들을 버리시고, 거룩과 사랑과 같은 본질적 속성들을 유지하셨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자기 축소의 결과로 그분은 지상에서 전적으로 인성의 조건들 속에서 사셨다는 것이다.
-게스(Gess) : ‘케노시스’가 상대적 속성들뿐만 아니라 본질적 속성들까지도 포기하는 절대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자기 축소는 삼위일체의 내적인 관계에까지도 영향을 주어서,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 동안에 성부에 의한 성자의 영원한 나심과 성자의 우주적인 기능들이 일시적으로 방해를 받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찰스 고어(Charles Gore) : 그는 “그리스도가 변하지 않는 인격성 안에 있으면서, 인성을 취하기 위하여 신적 존재 양식이 가지는 어떤 대권들을 포기하셨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자기 희생 과정의 결과로 그리스도는 인성의 조건들 가운데서 온전히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사셨다는 것이고 이러한 자기 희생 과정의 결과로 그리스도는 인성의 조건들 가운데서 온전히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인간적인 경험과 불립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포기하셨다는 것이다. 분명한 강조점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지하심을 내던지셨다는 것이다.
-포사이드(P. T. Forsyth) : ‘케노시스’ 사상이란 다름 아닌 영원하신 아들의 도덕적 권위로서 자신의 옷을 스스로 벗는 것이며 그 영원하신 아들은 자기의 의식은 보유하고 있지만, 무한성의 조건들과 그 무한성이 낳은 형체는 철회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는 속성을 버릴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어떤 각도에서나 혹은 어떤 관계에서 볼 때 속성은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확언한다. 이리하여 그는 전지, 전능, 편재가 철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속성이 아니라 속성의 기능 혹은 속성의 변형이기 때문이다.
2) 케노시스 이론에 대한 비판들
칼케돈 신조와 속성의 교리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을 조화, 결합시키려고 했던 케노시스 교리는 결국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윤철호, 「예수 그리스도(상)」(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355.
케노시스 이론에 대한 비판들은 너무나 많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브루스(A. B. Bruce), 템플, 베일리 등의 비판이다. 다음은 중요한 난점들이다.
-케노시스 이론은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그의 신성의 일부를 포기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빌립보서 2:5-7의 본문을 가지고 독일(약1860-1880년 경)과 영국(1890-190년 경)의 몇몇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신성의 일부를 포기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생활하시는 동안 우주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가 만물을 유지하시는 분이며(히 1:3), 만물이 그분 안에서 서로 붙잡고 유지되고 있다고(골1:17) 분명히 밝힌다. 그리스도를 떠난 우주는 보존하시는 분이나 주재자가 없이 존재하는 우주이다. 그리고 그에게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이 없다면 우주를 보존하고 다스리는 일은 그리스도의 능력 밖의 일이 될 것이다. 힘을 제거해 버린 그리스도 사상을 포함하는 어떤 형태의 케노시스설도 그의 우주적 기능들을 수행하는 주님의 능력에 치명적이다.
-케노시스 이론은 칼케돈의 기독론과 잘 맞지 않는다. 성육신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의 신성을 적어도 그의 지상 생활 동안에는 심각하게 축소한 불완전한 것으로 그렸다. 실제로, 케노시스설의 언어는 대부분 단성론적이다. 그것은 한 위격 안에 두 의식과 두 지성과 두 의지가 있다는 사상이 불합리할 뿐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즉 만약 그가 사람이었다면, 그는 하나님일 수 없다는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인성을 위해 지불되는 대가가 너무 비쌌다. 그리스도는 무지함이라는 인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지하심이라는 신적 특성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칼케돈 신조와 더불어 “신성에서도 똑같이 완전하며, 인성에서도 똑같이 완전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단 한분의 성자”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으며, 신적 본성과 마찬가지로 인적 본성이 각각 위격적 연합 가운데서도 각자의 고유한 특성들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어떻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불완전한 인성이 칼케돈 신조와 양립할 수 없다. Ibid.,287.
-케노시스 이론은 선재하신 아들과 성육하신 아들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이론에 따르면, 육체를 입는 순간까지 아들은 전지하셨으나 성육신의 순간에 그의 지식은 무한에서 1세기 유대인의 지식으로 축소된다. 그는 사실상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망각했다. 그저 정보만 줄어든 것이 아니라 그 일은 그와 더불어서 정신적 소양과 사고 방식에도 심대한 변화를 낳았다. 실로 그것이 너무나 심대하여서 그리스도의 의식의 절망적인 몰락을 나타낼 정도이다.
-케노시스 이론은 역사상의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를 분리시키는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 케노시스주의자들은 “적어도 지상에 계시는 동안 그리스도는 전혀 신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R. R. Redman Jr., ‘H.R. mackintosh’s Contribution to Christology and Soteriology in the Tewntieth Century’ in the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vol. 41, no.4, pp.485
이것은 복음서들이 제시하는 증거들에 전적으로 모순된다.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가 자신이 영원하신 아들임을 아시고, 자연의 힘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보여 주시며(막4:41), 온 세상의 짐을 다 지고 갈 수 있다고 주장하시며(마11:28), 도덕 세계 전체에 대한 심판을 고대하시며, 하나님 한분에게만 마땅한 종류의 경배를 전혀 당혹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을 이끌어냈던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신으로 보았다는 결론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증거에서부터였다. 그 믿음은 교회의 삶과 예배에 핵심적이며, 케노시스 이론에는 치명적이다.
-케노시스 이론은 본래 해결하고자 의도했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 이론은 단일성과 주님의 인성의 실재성을 보전하려 했다. 그러나 위격의 단일성이 인간 영혼과 공존하는 인적 로고스를 가정함으로써 확보되지 않음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인간 영혼을 무력화된 로고스로 대치시킴으로써 인성의 실재성이 보전되는 것도 아니다. 케노시스론자들이 제시한 그리스도는 신도 인간도 아닌 존재이다. 위필드 박사의 표현을 따른다면, 그의 인성은 “단지 위축된 신성(just shrunken deity)”인 것이다.
3) 참된 케노시스
바울은 본문을 말하면서 비우는 것은 역할과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근본적인 속성과 본질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바울은 빌립보교인들로 하여금 겸손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도록(빌2:4) 설득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본으로 삼았다(빌2:5-7).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늘에서 그의 것이었던 신분과 특권을 포기하신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케노시스 사상 없이도 지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기독론도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웠으며’(빌 2:7), 부요하신 분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고후8:9)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각별히 빌립보서 2:6이하에서 정의하는 ‘케노시스’ 사상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사상에는 선재하신 그리스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이 포함된다.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2:6)로 계셨다. 그러므로 ‘케노시스’의 주체(즉 ‘자기를 비우신’ 이)는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성부와 함께 영광을 누리셨던 분이다(요17:5). 그는 신성의 엄위를 모두 소유하셨으며, 그 신성의 기능을 모두 수행하셨고, 모든 대권을 다 누리고 계셨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들이 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도널드 맥클라우드, 「그리스도의 위격」,김재영 역, (서울:IVP, 2001), p291-292
-그리스도가 자기의 권리들을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신학적인 출발점은 그리스도가 이미 하나님과 동등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정받고, 존경받고, 가난과 고통과 비하에서 면제되어야 할 권리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체로 계신 그분은, 이러한 권리들을 주장하지 않으셨다. Ibid., 284.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웠다는 사실이다. 빌립보서 2:7이하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우셔서 취하신 것은 다음 세 가지와 관련이 있었다. ①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이셨듯이, 확실히 종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성부와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셨다. 이제 그는 율법 아래서 순종해야 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짊어진 종이 되었다(요17:4). ②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오로지 인간적이었던 공적 이미지를 취하셨다. 그는 사람들의 모양(‘호모이오마’)과 외모(‘스케마’)를 취하셨다. 바울이 ‘모양’과 ‘외모’와 같은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예수님이 주신 인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았을 때,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였을 뿐이다. 그의 외모에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는 정말로 병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③ 그리스도는 죽음, 그것도 ‘십자가에서의 죽음’(빌 2:8)을 취하셨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죄를 다 모으셨다. 그리하여 바로 그 곳 그 때에 자기 아들의 육체 가운데서 그 죄를 심판하고 정죄하셨다(롬 8:3).
그는 그렇게 죽기까지 자기의 권한과 권리들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을 죽기까지 자기를 비워 주음과 연결되는 일을 단호하게 받아들이셨다. 그는 육체가 되셨으며, 그리고 나서 더욱 깊이, 죽음을 맛보는 데까지 걸어 들어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