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노시스 기독론이란 무엇인가?

▶ 케노시스 기독론이란 무엇인가?

1. 케노시스 기독론이란 무엇인가? 케노시스의 정의

1) 케노시스 기독론은 빌립보서 2장 7절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비워 [heauton ekenosen]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헬라어인 ‘에케노센’에서 ‘케노시스’라는 개념을 차용, 신학적으로 발전시킨 이론이다.



2) 케노시스 기독론은 정통 기독론을 그리스도에 대한 과학적 해석과 화해를 시키려고 의도되었다. 즉, 삼위일체의 제 2위 하나님께서 자신을 제한하심으로써 완전한 인간이 되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 이 과정에서 그의 하나님되심이 멈추어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온전한 사람이 되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3) 케노시스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변호하였으며 또한 예수를 ‘실제의’ 인간으로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도 역시 확보되어야 한다는 의도를 보였다. 정통 기독론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의 과학적 접근이 예수의 참된 인성을 이해하도록 하는데 기여한다. 이것은 이미 초대 교부들이 채용한 케노시스 개념 보다 더 그리스도의 인성을 확보하였다.


4) 교부들이 이해한 케노시스는 신의 경륜적인 활동을 넘어서지 못하였지만 현대의 케노시스 기독론자들은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실질적인 활동을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2. Gottfried Thomasius의 케노시스 기독론

    1) 토마시우스는 스트라우스 (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와 바우어 (Ferdinand Christian Baur, 1792-1860)와 같은 역사 비평 학자들이 주장한 정통 기독론의 ‘실수’와 관련하여 양성론이 위격적인 연합이라는 개념만 가지고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인격체로 구성되어 있음에 대하여 밝히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토마시우스는 케노시스 기독론의 이론이 그리스도가 실제의 인성을 갖고 있음을 충분히 정당화 시킬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위격적 연합 자체를 거부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갖는 약점, 곧 그리스도의 인성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하고자 하였다. 그는 오히려 전통적인 이 용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가 승귀시에 소유한 인성을 변호하기도 하였다.그 대안으로 그는 케노시스라는 개념이 적절한 기독론을 위해 필요함을 제안하였다.

    2) 성육신의 가능성
    토마시우스는 성육신의 가능성과 그 실제, 곧 한 인격체가 온전한 인성과 신성을 지니며 하나가 되는 한 인격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피력하였다. 인성이 신성의 침투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인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natura humana capax divinae). 그는 이러한 성육신의 가능성이라는 생각을 인성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수용성, 그리고 인간이 갖는 하나님과의 자연적인 친족 관계라는 개념에 근거하여 피력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주장하기를 그리스도 안에 어떠한 신격화도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성자는 자기 자신을 이미 존재하는 한 개인(individual) 인간 안에 연합시켜 나중에 그 개인을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nature)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성을 취하셨다는(assumption) 말은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인격체를 보증하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3) Kenosis 개념의 필요성
    토마시우스는 성육신의 행동을 성자의 인간 본성을 취하셨음을 말하는 동시에 그분의 자기 비우심을 통하여 일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성자 하나님께서 케노시스라는 행동을 통하여 육신이 되시고 완전한 인간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셨던 이미지가 인간이라는 어떤 ‘형태’ 곧 이 상태를 보면 어떤 ‘전이’가 분명코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육신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인간의 본질을 외형적으로 입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는 정말로 완전하게 우리와 같이 되셨고 말 그대로, 문자 그대로 그와 같이 되셨던 것이다.

    4) 신성의 상실 불가능성
    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셨을 때 하나님에게 본질적인 신적인 그 어떤 것도 버리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형태로서의 존재를 갖기 위하여 자신에게 있어서 신적인 양태를(mode) [버리신 것이며] 바로 그것으로 인하여 그가 성부와 함께 처음부터 가지고 세계를 상대해서 행사하시며 철저하게 지배하고 다스리셨던 신의 영광을 포기하신 것이다.
    ②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완전히 같은 모습으로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은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시는 행동을 의미한다. 성자 하나님은 자신을 지상의 삶에로 제한하려는 의지를 가지셨다. 여기서 성자 하나님의 ‘의지’는 곧 신적인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케노시스 삶은 하나님이 하나님되는데 본질적이어야 할 그 어떤 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를 비우며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으셨다는 말이다.

    5) 신의 속성 분류
    ① 케노시스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신의 속성을 절대적 혹은 내재적인 것들과 상대적인 것들로 나누었다. 절대적 혹은 본질적 속성 즉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속성들은 절대적인 능력, 내재적인 신적인 지식, 내재적인 신적인 삶, 절대적인 진리 그리고 절대적인 사랑과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속성들은 결코 포기될 수 없다.
    ② 하나님은 외향적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기 위해 소위 상대적 속성들 즉, 전능, 전지, 그리고 편재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속성들은 하나님에게는 버려질 수도 있는 것인데 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속성들이 신의 본질적인 특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적 속성이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것 다시 말해서 절대적인 능력, 진리 그리고 사랑 등이 표현되는 것인 것이다. 성자 하나님은 신적인 자기 정체성을 사라지게 하지 않으면서 소위 상대적인 신의 속성들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③ 케노시스 방식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잠재적인’ 형태에서만 신의 자의식을 소유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신의 자의식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두 개의 자아 혹은 이중의 삶을 상상하지도 않았다. 신의 자의식이 인간의 성장의 과정을 따라 점진적으로 신의 자의식이 발현되었거나 혹은 활동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6) 로고스와 자의식의 잠재성
    ① 로고스가 잠재성을 갖도록 스스로 물러났다면 이것은 바로 로고스가 자기를 제한시키는 행위로 인하여 자기 계시와 활동을 전개하는 자리에서 그의 가장 깊은 곳의 한 가운데로 한 걸음 물러났다는 것, 다시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지극히 절대적인 의지를 갖는 바로 그의 구체적인 존재의 근원에로 자리를 옮겨 스스로를 움츠러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로고스가 잠재성의 위치에로 한 걸음 물러났다는 것은 결코 로고스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본질적인 것은 그 어떤 것도 포기되지 아니하였다는 말이다. 성자 하나님은 단지 케노시스라는 방법을 통하여 수치스러운 삶을 살기로 작정 하셨다는 것이다.
    ② 이러한 논리로 토마시우스는 자기의 케노시스 기독론이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면서 사람으로서 사신 생애를 잘 묘사한다고 믿었다. 그리스도는 본질적인 신의 속성, 예를 들면 로고스와 자의식을 잠재된 형태로 소유하고 계셨기 때문에 토마시우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자아가 상실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육체가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인간적인 자아가 사라지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하나님이면서 인간인 자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그는 분명코 위격적 연합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자 하나님은 피조된 인격체라는 존재 양식으로 만들면서 스스로 바로 이러한 우리와 같은 본성을 취하셔서 스스로 영육을 가진 인간이라는 한 개인의 자아를 갖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본인 자신의 의식은 그것이 나타날 때 외형적으로는 어떤 독특한 모습의 인간적인 것, 인간 의식을 지니고 진정으로 영육을 지닌 유한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③ 토마시우스에게는 인간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는 그것이 어떤 존재의 완전함과는 달라서 자의식과 인격성은 (hypostasis) 같은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전자의 것은 자기 자신이 그 자체로 나타나게 되는 형태이며 후자의 것은 전자가 있기 전 이미 현재 있는 상태로 점차적으로 자신을 의식의 상태로 열어 내어 줄 뿐인 것이다.

    7)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 유지
    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가(intratrinitarian relation) 깨어지는 불행을 겪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살면서 내재적 속성들을 소유하고 계셨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단호하게 말하기를 “삼위 하나님 서로 간에 내재적인 관계는 성자가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결코 중단되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② 성자께서 인간이 되실 때 그가 인격의 통일성을 견지하며 자신에게로 취하신 인성이, 삼위일체가 갖는 지식과 그의 생활로 지극히 깊숙하게 들어와서, 인간이 된 이 존재는 이제 신의 내재적 관계에로 들어가는 한 순간을 맞게 되고, 성자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면서 인간[a divine-human]이 되는 등, 삼위 하나님 사이에 상호 교제가 이제는 성부와 성령 안에 있는 인간 예수와의 교제의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3. 케노시스 기독론의 평가

    1) 긍정적 기여
    ① 토마시우스의 케노시스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참 인성을 확보하였다는 것이다. 성자가 이 땅에 사실 때 그는 우연적이고 제한적이며 죽을 운명을 지닌 유약한 인간으로 사셨다는 참된 인성을 제시하였다는 말이다.
    ② 케노시스 기독론이 하나님의 자기 수치 혹은 그의 희생을 잘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에로 비하하시고 피조물의 원리에 자신이 성장하도록 허락하신 것, 그리고 갖은 고초를 실제로 겪으신 모습은 놀라운 그의 희생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성육신 이론도 이처럼 가슴에 와 닿도록 하나님의 인간되심을 설명한 이론은 없다.
    ③ 케노시스 기독론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우는 행동을 취하신다고 말할 때 그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성자 하나님이 케노시스라는 형식을 빌어 인간으로 사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내려오기로 의지를 굳히셨기 때문인 것이다. 케노시스의 삶은 바로 하나님의 강한 의지의 반영인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틀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논한 기여도가 크다.

      2) 토마시우스의 한계
      ① 성자 하나님이 임시방편이지만 전능하심, 전지하심, 그리고 편재하심을 멈추었다 하여도 반드시 그가 소위 ‘상대적’ 속성들을 버리는 것이 필연적이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풀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정체성과 소위 ‘절대적’ 속성을 갖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라는 문제이다. 전통적인 신조에서 고백되어지는 것과 같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이라면, 그리스도는 실제로(de facto) 그러한 신의 속성들을 지녀야 할 것이다.
      둘째로, 토마시우스는 소위 ‘절대적’ 속성들을 갖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그 이미지를 나타내 보여주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지상 활동을 그리스도의 삶과 그의 사역 안에서 발견할 수 없는가? 요한복음 10:38절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의 것이었다. 만일 그리스도의 신적인 사역이 ‘절대적인’ 속성들로부터 (이 신적인 사역은 세계와의 관계라고 말하기 때문에) 오지 아니하였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사역을 하실 수 있었겠는가?
      ② 토마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설명하면서 ‘절대적인’ 속성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또한 그는 성경이 그리스도의 신적인 사역에 관하여 가르치는 말씀에 민감하지 못하였다. 물론 그리스도는 일시적으로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편재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들이 완전히 버려졌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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