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빈의 기독론 중심으로 본 그리스도의 신성
1. 칼빈의 기독론과 그리스도의 신성
1) 말씀의 신성과 영원성(그리스도, 육체를 입으신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 속에서 우리 앞에 제시될 때, 그 말씀을 그저 하나님께로부터 발설되어 공중에 퍼져 나가는 그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그런 소리로만 상상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라 할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 “말씀”이라 할 때는 하나님과 더불어 거하는 영원하신 지혜를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신탁들과 예언들이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모세는 창조의 기사에서 이 “말씀”을 중개자(intermediary)로 제시하여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개개의 창조 활동에서, ‘이런저런 것이 이루어져라’ 라고 말씀하셨음을 구체적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말씀을 통해 그의 형상 속에서 찬란하게 비쳐지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 말씀을 어떤 계명이나 명령쯤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사도들은 세상이 성자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하고 있다(히 1:2-3). 여기서 말씀이 성자의 명령 또는 지령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성자 자신이 성부의 영원하시고 본질적인 말씀이신 것이다. 또한 잠언 8장 11절에도 지혜가 영원 전에 성부에게서 나셨고, 또한 세상 창조와 및 기타 모든 하나님의 활동을 주관하셨다고 소개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이를 가리킨다.
그는 세상의 창조 때부터 자신이 성부와 더불어 끊임없이 일해 오셨음을 천명하심으로써, 모세가 간단하게 언급한 바를 더 확실하게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분명한 설명은 요한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나타난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요한은 곧바로 그 말씀에 견고하고도 영원한 본질을 부여하며, 또한 무언가 고유한 것이 그에게 있음을 드러내며,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그의 거룩한 입을 여신 바로 그때에 비로서 처음 존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본체에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으로 상상하는 것인데, 이는 그야말로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 어떤 우발적인 일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이셨고 또한 후에 세상의 창조자이셨던 그 말씀에게 그의 존재가 시작된 시발점이 있다는 식으로 상상하는 것만큼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는 말씀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시간의 한계를 규정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나신 바 되셨고, 영원 전부터 그와 함께 거하신 것이다. 그 말씀의 영원성, 그의 참된 본질, 그리고 그의 신성이 이로써 입증되는 것이다.
2) 구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또한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가운데 하나인 최고의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유대인들은 이 본문을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라는 식으로 본문을 고쳐 읽고는, 오로지 “평강의 왕”이라는 칭호만 성자에게 해당된다는 식으로 반론을 제기한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에 대한 칭호들을 그렇게 많이 여기에 열거할 이유가 없으며 조금 앞에서 그를 “임마누엘”(사 7:14)이라 칭했을 때와 동일한 목적으로 지금 그를 가리켜 여기서 “전능한 하나님”이라 칭하고 있다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증거가 예레미야서에 나타나있다: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23:5-6).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은 그저 칭호에 불과하다고 가르치면서도 이 “여호와”라는 이름만은 너무도 고귀하여 입으로 발설할 수도 없는 것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그리고 그 여호와께서도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고 선언하고 있으니, 독생하신 성자께서 영원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여호와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신다는 사실이다. 거룩한 족장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자신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렀다는 말씀들이 나타난다(삿 6:11-12, 20-22;7:5,9). 종이라면, 자기 스스로 희생 제물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천사는 오히려 음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여호와께 드릴 번제를 자기에게 드리라고 명령한다(삿13:16).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삿13:18)
천사의 이 대답이 모든 의심을 제거해 준다. 아브라함이나 기타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최고의 천사였고-말하자면 일종의 예비단계로서-중보자의 직분을 수행하기 시작하셨다는 교회의 정통 신학자들의 해석이 올바르고 지혜로운 것이다. 그 말씀이 아직 육체를 입지는 않으셨으나, 중재자로서 강림하셔서 신자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접근하셨고, 이처럼 더욱 친밀한 교류 때문에 그가 천사라는 이름으로 불려지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 자신의 고유한 속성, 즉 하나님으로서 지니신 말할 수 없는 영광은 그대로 유지하고 계셨다. 다음 말씀들(창 32:29, 사 25:9, 호 12:5, 말 3:1)은 더욱 더 분명하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3)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의 사역과 그의 이적에서 드러남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더불어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참여하실 뿐 아니라, 피조물들에게는 절대로 전해지지 않는 다른 개별적인 직부들도 수행하신다. 유대인들은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 43:25)를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말씀으로 단언하셨고 또한 이적을 통해서 입증하신 것이다(마 9:6)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하는 일을 시행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주께서 결코 다른 이에게 넘겨주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실질적인 권세까지도 친히 지니고 계시다고 결론을 짓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또한 그가 베푸신 이적들에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난다. 물론 선지자들과 사도들도 그리스도와 똑같이, 혹은 아주 비슷하게 이적을 행하였다. 그러나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물들을 나누어 주었는데 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복음서 기자는 그가 사도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병자를 낫게 하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을 주셨음을 보도하고 있다.(마 10:8; 막 3:15; 6:7)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러한 권능이 다른 분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왔음을 명확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적을 행하였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행3:6).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적에 호소하셨다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이적들은 그 자신의 권능으로 행해진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해 주는 완전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요 5:36; 10:37; 14:11). 또한 하나님을 떠나서는 구원도, 의도, 생명도 없는데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친히 지니고 계시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믿느냐?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다(요 14:1). 스데반의 기도에서 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간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