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빈의 기독론과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
1. 칼빈의 기독론 중심 그리스도의 인성 – 그가 참 사람이신 증거
마르키온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그저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상상했고, 마니교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천상적인 육체를 부여 받으셨다고 꿈꾸었다. 그러나 성경의 수많은 강력한 증언들이 이 둘을 모두 반대하고 있다. 하늘의 씨나 유령 같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의 씨에 축복이 있을 것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12:3; 17:2; 18:18; 22:18;26:4) 뿐만 아니라 허공에 뜬 사람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요 그의 허리에서 난 자에게 영원한 보좌가 약속 되고 있는 것이다(시 45:6;132:11) 그렇게 때문에 그는 육체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신 것이다(마 1:1).
주님 자신은 그냥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만족하지 않고, 흔히 자기 자신을 가리켜 “인자”(사람의 아들)라 부르시며, 그리하여 자신이 정말로 인간의 씨에서 난 사람이심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하신 것이다. 그는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실 만큼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셨고(히 2:16) 오히려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는데, 이는 혈과 육을 지니사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려 하심이었다”(히 2:14). 또 다른 증거를 들면, 우리가 그와 연루된 덕분에 그의 형제들로 인정된다는 것이다(히 2:11)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세상에 직접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도 있었으나, 자신의 권리를 버리시고 자의로 자신을 비우셨음을 말하며,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상을 취하셨고, 그런 비천함으로 만족하셨으며, 그의 신성이 육체라는 휘장으로 가려지도록 하신 것이다(빌 2:5-7).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선언하여,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신 이후에 다시 새로운 영광을 얻으셨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의 승귀(昇貴: exaltation, 높아지심)가 있다. 그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부여 받은 일이 없다면, 이런 높아지심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기 위하여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심을 받았다(롬 8:3-4)는 것은 그리스도와 보통 사람을 아주 조리 있게 구별하여,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지만 허물과 부패가 없으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점이 전혀 없으시며 또한 성령의 은밀한 역사를 통하여 마리아의 씨에서 나셨다면, 여자의 씨는 부정하지 않고 오로지 남자의 씨만 부정한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점이 전혀 없으시다고 하는 것은 비단 그의 모친이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그를 낳으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 아담의 타락 이전에 있었을 그런 순전하고도 더럽혀지지 않은 그런 상태로 생산되셨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곧, 성경이 그리스도의 순결하심을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그의 참된 인성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순결하시다는 말을 구태여 할 필요조차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요한이 17장에서 말씀하는 거룩하게 하심도 그의 신성을 일컫는 말씀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요 17:19). 물론 인간의 오염 상태가 그리스도께서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생식 그 자체가 부정하고 악한 것은 아니다. 다만 타락의 결과로 나타난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순점함을 회복하셔야 할 그리스도께서 그런 인류 공통의 부패성을 면하셨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2. 칼빈이 본 ‘그리스도의 두 본성(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을 이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고 말할 때에, 말씀이 육신으로 변했다거나 육신과 뒤섞여 혼합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 말은, 말씀이 동정녀의 몸을 자신이 거할 성전으로 선택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이요, 이는 본질의 혼합으로 된 일이 아니고, 위격(位格)의 통일로 된 일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지극히 큰 신비와 비슷한 것을 인간사에서 굳이 찾는다면, 가장 근사란 것은 사람이 두 가지 본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일 것 같다.
영혼은 육체가 아니며, 또한 육체는 영혼이 아니다. 그러므로, 육체에는 절대로 적용되지 않고 영혼에만 고유하게 해상되는 사실이 있으며, 육체에 대해서도, 영혼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사실들이 있고, 또한 영혼이나 육체에게 구별되어 적용되지 않고, 전인(全人)에게 해상되는 사실들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때때로 영혼의 특성이 육체에게 전해지고, 육체의 특성이 영혼에게 전해지기도 하지만, 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사람은 여럿이 아니고 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표현들은 사람의 한 인격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 연합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두 가지 상이한 본질들이 이 인격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렇게 말씀한다. 때로는 오로지 그의 인성에만 해당되는 말씀을 사 42:1; 눅 2:52; 요 8:50; 막 13:22; 마 24:36; 요 14:10; 눅 24:39, 때로는 오로지 신성에만 해당되는 말씀을, 요 8:58; 골 1:15,17; 요 17:5; 요 5:17
때로는 두 본성 모두를 포괄하고 하는 말씀을 한다(요 1:29; 요 5:21-23; 요 9:5; 8:12; 10:11; 10:9; 15:1; 고전 15:24; 빌 2:10).
그리고 성경은 이처럼 두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 있음을 아주 조심스럽게 표현하는 나머지, 때로는 그것들을 서로 교환시키기까지 한다. 이런 비유적인 표현법을 가리켜 옛날의 교부들은 “속성간의 교류”라고 불렀다. 행20:28; 고전2:8; 요일1:1; 요일3:16; 요3:13
3.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중보자의 필요성
참 하나님이요 동시에 참 사람이시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이 필수적인 문제냐고 물을 사람이 있겠지만, 그것은 사람의 구원을 좌우하는 하늘의 작정(作定:decree)에서 나온 것이다.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최선을 것을 작정하셨다. 우리의 죄악이 마치 구름처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득 끼어 있어서 우리를 천국에서 완전히 격리시켜 놓았으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평화를 회복시킬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할 사람이 없었다. 하나님의 위엄 자체가 우리에게 내려오지 않으셨더라면 우리에게는 절망뿐이다. 우리로서는 그에게로 올라갈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시고(사 7:14; 마 1:23) 그리하여 그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이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고, “하나님”이란 단어를 생략했듯이 “사람”이라는 단어도 생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입을 통해서 연약함을 도우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와 같은 한 사람으로서 우리 가운데 친근하게 세우신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서 중보자를 찾아야 하며 어떤 경로로 그에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사람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그를 “사람”이라 부르시고, 그리하여 그가 우리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의 사명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게로 회복시키셔서 사람의 자녀들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었고, 지옥의 상속자들을 천국의 상속자들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지 않으셨다면, 그리하여 그가 우리의 것들을 취하시고 그의 것을 우리에게 베푸시고 또한 본질상 그의 것인 것을 은혜로 우리의 것이 되게 하지 않으셨다면, 과연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보증에 의지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몸을 취하여 자기의 몸을, 우리의 살을 취하여 자기의 살을, 우리의 뼈를 취하여 자기의 뼈를 이루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셨으니 말이다(엡 5:29-31).
4.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위격
옛날 교부들은 중보자의 위격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리하여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흐리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올바른 이해의 열쇠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곧, 중보자의 직분에 적용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 중 어느 하나에 속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심판주로 임하시기까지 그리스도께서는 통치를 계속하실 것이며, 또한 우리의 연약함이 허용하는 만큼 우리를 아버지께 연결시키신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의 영광에 참여한 자들이 되어 하나님을 있는 그래도 보게 될 때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중보자의 직분을 다 완수하셨으므로 아버지의 사신(使臣) 역할도 끝내실 것이요, 창세 전에 그가 누리셨던 그 영광으로 만족하실 것이다.
“주”라는 칭호가 적용될 때에도,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우리의 중간에 위치하신다는 점에서 그렇게 적용되는 것이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진술도 이와 일치한다: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위엄을 직접 대면하여 볼 때까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권(lordship)을 맡겨두셨다는 뜻이다. 그 이후에는 그가 주권을 다시 아버지께로 돌려드리시고, 그리하여 그 자신의 위엄이 사라지기는 커녕 그 주권이 더욱 밝히 빛나게 될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의 머리이시기를 그만두실 것이다. 지금은 마치 수건에 가려진 것처럼 비쳐지고 있는 그리스도 자신의 신성이 그때에 가서는 그 스스로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