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을 통한 칼빈의 기독론 고찰 (1)

▶ 사도신경을 통한 칼빈의 기독론 고찰 (1)

(1) 빌라도를 통한 정죄와 칼빈의 기독론

성경은 우선 유대 총독 빌라도 앞에서 그리스도가 정죄를 받으신 이야기를 해서, 우리가 받아야 하는 벌이 이 의인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가르친다. “총독”이라는 칭호를 말하는 것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주장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이사야의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가르친 뜻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고, 총독의 공식 선고에 의해서 범죄자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범죄자가 아니었다-재판관 자신이 자기는”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증언해서(요 18:38) 그가 의인이심을 선언했다. 바로 우리가 벌을 받아야 할 죄책이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전가된 것이 우리의 무죄 석방이 된다(사 53:12).

(2) 사도신경 “십자가에 못 박히사”와 칼빈의 기독론


하나님의 율법 규정에서도(신 21:23) 십자가는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 스스로 저주를 받으셨다. 일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아니, 우리를 덮고 있던 저주를 전적으로 우리에게서 들어 그리스도에게 옮겨 놓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무 죄도 없이 완전히 깨끗하면서도, 우리가 지은 죄악의 수치와 비난을 맡으시고, 그 대신에 우리에게 자기의 순결을 입히셨다. 죄의 저주가 그리스도의 육신에 전가되었을 때에, 아버지께서 죄의 세력을 깨뜨리셨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사 53:6) 하는 예언자의 뜻은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적하는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 내셨느니라”고 바울은 말한다(골 2:14~15).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도가 “다른 사도”라는 말을 씀으로써 칼빈은 히브리서의 기자가 바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도 여러번 바울이 아니라고 한다.


증언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자기를 드렸기” 때문이다(히 9:14). 여기서 저 본성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일들이 우리 마음속에 굳고 깊게 뿌리를 박기 위해서 우리는 희생과 씻음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의 구속과 몸값과 대속물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구속 방법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피를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흘리신 ㅍ는 배상이 되었을 분 아니라 우리의 부패를 씻어 버리는 목욕 대야가 되었다(참조, 엡 5:26, 딛 3:5, 계 1:5).

(3) 사도신경 “죽으시고 묻히시며”와 칼빈의 기독론


그가 우리를 구속하는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모든 점에서 우리를 대신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의 멍에 밑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죽음의 권세에 자기를 넘겨 주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하셨다. 그의 목적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는 것이었다(히 2:14~15). 이것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처음 열매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우리가 얻는 둘째 효과는 우리가 그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땅에 붙은 우리의 지체들을 죽여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며, 우리 안에 있는 예 사람을 죽여 번성하거나 결실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매장도 같은 결과를 나타낸다. 그 매장에 우리도 참가함으로써 그와 함께 죄에 대해서 매장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는 우리가 받아 즐길 이중의 축복을 제시한다. 즉, 우리가 결박되어 있던 그 죽음에서 해방되며, 우리의 육을 죽이는 것이다.

(4) 사도신경 “지옥에 내려가사”와 칼빈의 기독론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속을 실현하기 위해서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신경에 대해서 주목할 점은, 거기 우리의 믿음의 전체가 모든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포함되었으며,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오지 않은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이 조문을 신경에 넣는 데 대해서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문장을 1559년에 삽입한 것은 이 신조에 대한 비판이 재연되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1553년 6월 17일에 John a Lasco가 Bulliger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London에 있는 독일 피난민 교회의 목사 Walter Deloenus가 이 신조는 “주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이므로”(참조. 마15:13) 제거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견책을 받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했지만, 유해한 논쟁이 생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슨 필요가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혼이 그들을 석방하러 그리로 내려가셨을것인가?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으로 그들에게 비추셔서, 그들이 소망으로만 맛보던 그 은혜가 그 때에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아마 Zwingli의 Exposition of the Faith의 “Christ the Lord”라는 부분의 해설을 언급하는 듯하다(Zwingli, Opera, ed. M. Schuler and J. Schulthess, IV. 49; tr. LCC XXIV.252). 지옥 강하 문제에 대하여 참조하라. Peter Martyr, Locicommunes3. “Simple Exposition of the Articles of the Creed” 20 and 3.xvi. 8-25 (1576 edition, pp.476, 814~825).


베드로서에 있는 귀절도 아마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망대’에 있는-또는 보통 번역하는 대로, ‘옥’에 있는-영들에게 전파히시니라”(벧전 3:19). 문맥으로 보아서, 그 때보다 먼저 죽은 신자들도 우리와 같은 은총에 참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에 대해서 더 확실한 설명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있는 설명은 거룩하고 경건할 뿐 아니라, 놀라운 위로가 가득하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하신 고난을 신경이 말한 다음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저 보이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심판에 대해서 적절히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시는 대가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한 값도 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뜻이다.그는 폭력이나 필연성의 강요를 받아서 굴복하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에게 대한 사랑과 자비심으로 굴복할 생각을 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받으신 모든 고난은 조금도 그의 권능을 갂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가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피고로서 서 계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가 얼마나 가련하고 무서운 고민을 하셨는가를 추측할 수 잇다고. 그리스도의 영의 신적 능력이 일시 숨어 있고 육의 연약이 자리를 차지했지만, 고통과 두려움에서 온 그 시련은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점은 격렬한 고민 중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치신 그의 비범한 기도가 증명한다. 그는 무한한 고통을 느끼셨지만 자기를 버리셨다고 외친 그 하나님을 여전히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런데 이 점은 아풀리나리스와 이른바 단의론자들의 과오를 논박한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에게 영원한 영이 있었으나 영혼은 없었다고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절반 사람에 불과하셧다고 한다. 라오디게아의 Apollinaris (360년경)는 “처녀 마리아에게서 받은 신체 안에” 하나님의 로고스가 “영혼으로서 내주하셨다.”고 가르쳤다.


그가 아버지에게 복종하시지 않고 어떤 다른 방법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것같이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복종하는 성향이나 의지는 영혼에 있지 않고 어디 있는가? 그의 영혼이 불안을 느낀 것은 공포심을 구축하고 우리 영혼에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 주려고 하셨기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단의론자들과는 단의론자들은 단성론으로 인한 분열을 해소하려고, 7세기에 나타났다.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에게 한 본성이 있을 뿐이라고 가르쳐서 칼케돈의 결정을(451년) 거부했는데, 단의론자들은 Heraclius 황제의 타협적인 칙령을(683년) 기초로 삼아 두 본성을 인정하면서 한 능력 또는 의지만을 인정했다. 그들의 주장을 제 3차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는(681년) 13회기에서 명확히 배척했다.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신성에 따라서 원하신 일을 인간으로서는 원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말한 공포심을 반대 감정으로 극복하셨다는 사실을 나는 말하지 않겠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하시니(요 12:27~28), 이것은 분명히 커다란 모순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시면서도, 우리가 자신을 억제하려고 굉장히 애쓸 때에 보이는 그런 극단적인 행동이 없으셨다. Calvin:1 p706~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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