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론과 그리스도의 구속

▶ 칼빈의 기독론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1. 구속자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을 그가 받게 된 것은 이유 없이, 또는 우연히, 또는 사람의 결정으로 된 일이 아니라, 최고의 명령(천사가 마리아에게 선포한 구원의 “명령”은 누가복음 1:28~33)을 전달한 천사가 하늘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즉, 우리의 구주가 되시도록 구속자의 직책이 그에게 부과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견고하지만, 조금이라도 그에게서 떠나는 순간에는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일체의 은총을 스스로 버리게 된다. 베르나르두스의 경고는 기억해 둘 만하다. “예수의 이름은 광명일 뿐 아니라 양식이다. 그것은 또 기름이다. 그것은 소금이다. 예수의 이름은 입에 꿀이요 귀에 음악이며, 마음에 기쁨이요, 동시에 약이 된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강화는 향기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가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가를 진지하게 숙고해야 한다. 이것은 그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확신하기 위해서 분 아니라, 또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충분하고 견고한 토대를 얻으며,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든지 이탈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2. 하나님의 진노의 비밀

하나님의 진노와 처벌과 영원한 죽음이 우리 위에 덮여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면(롬5:10, 갈3:10,13, 골1:21,22 참고), 하나님의 자비를 받지 않고는 우리가 얼마나 가련한가를 우리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며, 해방의 혜택을 경시했을 것이다. 우리 마음은 우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놀라며 압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도 생명을 붙잡는 열성이 부족하거나, 생명을 받아도 올바로 감사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이를테면 우리의 원수이며, 그의 손은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자비와 아버지 같은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3.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최고의 의이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서 보이는 불의를 사랑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부패한 본성과 거기 따르는 악한 생활 때문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 있는 자며, 나면서부터 저주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인자하신 주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자기의 것을 잃지 않고자, 우리 안에서 사랑하실 수 있는 것을 발견하신다. 비록 우리는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지만, 그는 우리를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그는 거저 주시는 순수한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들여 은총을 베풀려 하신다.


적대 관계의 모든 원인을 제거하며, 우리와 완전히 화해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제시된 속죄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을 일소하신다. 이전에 불결하고 불순하던 우리가 그가 보시기에 의롭고 거룩한 자로 나타나게 하시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화해를 얻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선손을 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며 호의를 가지신다는 확신을 가지려면, 눈과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만 고정시켜야 한다.

4. 하나님의 사랑에서 유래된 속죄 사업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선언하셨다고 하며(요 3:16), 반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다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시기 전에는 우리의 원수였다고 하는(롬 5:10) 귀절들도 서로 훌륭히 조화된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인용해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으며 변함이 없다. 우리가 성자의 피를 통해서 화해를 얻은 후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우주 창조 이전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도 독생자와 함께 아들들이 되도록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 무엇이 되기 전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화해를 얻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마치 아들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심으로써 하나님이 전에 미워하시던 자들을 이제부터 사랑하시기 시작하도록 만드셨다는 듯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우리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그와 화해했다. 내가 하는 말이 옳은지는 사도가 증언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며 악을 행했을 때에도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와 같이, 그는 우리를 미워하신 때에도 놀랍고 거룩한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는 그가 창조하시지 않은 우리의 상태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셨지만, 우리의 죄악이 그의 피조물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각 사람에게 있는 우리가 만든 것을 미워하시는 동시에, 그가 만드신 것을 사랑하실 수 있었다.”

5. 그리스도의 복종으로 인한 구속


어떤 사람은 묻기를 그리스도는 어떻게 죄를 없애 버리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없애며, 의를 얻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하여 호의와 친절을 품으시게 만드셨느냐고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데 곧 그의 복종 생활 전체에 의하여 우리를 위해 이 일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사도신경에서 가장 초자연적인 조항같이 보이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표현을 칼빈은 그리스도의 신성보다 주로 그의 인성을-아담의 한 후손이시었음을-증명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Pannier는 말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우리는 의인이 되느니라.”(롬5:19,의역)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는 용서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에 확대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형태를 취하신 때부터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해방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길을 더욱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성경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유한 특색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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