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을 통한 칼빈의 기독론 고찰 (2)

▶ 사도신경을 통한 칼빈의 기독론 고찰 (2)

1. 칼빈이 본 ‘심판자로써 그리스도

    (1)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있는 자기의 권능에 대해서 자기 백성에게 분명한 증거를 주신 다. 그는 승천하신 때와 같이, 보이는 형태로 하늘에서 내려 오실 것이다(행 1:11, 마 24:30). 오시면 양과 염소, 선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를 분리하실 것이다(마 25:31~33). 생사 간에 아무도 그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 칼빈의 <기독교 강요 p.722>

    2. 칼빈이 본 ‘그리스도의 충족성’

      (1) 심판자가 구속하시다
      우리에게는 놀라운 위로가 생긴다. 우리를 심판하실 이는 자기와 함게 심판하는 영예를 나눠 주시기로 이미 결정하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기 때문이다(참조, 마 19:28).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맡아 보호하시는 사람들을 정죄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은 훨신 더 확실하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리라고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바로 그 우리의 구속주가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대에 계시리라는 것은 평범한 보장이 아니다.


      신경이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간단히 요약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른다. 사도들이 공동으로 써서 발표했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전한 가르침을 충실히 수집하며 요약한 것이므로 넉넉히 사도들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생각했다. 신경이 어디서 나타났든간에, 교회의 바로 초창기 즉, 사도 시대에 모든 사람이 이구 동성으로 그것을 공중 고백서로 인정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유일한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전연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우리의 믿음의 역사 전체가 신경에 간명하고 질서 정연하게 요약되었으며, 성경의 순수한 증언에서 보증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예 부흥 이전에는 사도신경은 사도들 자신이 작성한 것이라고 믿었었다.

      (2) 신경의 모든 조항에 홀로 그리스도가 계실 뿐이다

      우리의 구원은 전체적으로 또 그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행 4:12). 그러므로 그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다른 데서 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주권을 구한다면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은 “그에게서” 온다는 것을 가르친다(고전 1:30). – 칼빈의 <기독교 강요 p.723~725>

      칼빈은 지금까지 논한 기독론이 다음의 “한 목적”(ad unum huncscopum)을 지향한다고 믿는다. 즉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의 율법 말씀을 경험한 후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3. 칼빈이 본 ‘그리스도의 공로성’

      (1) 하나님의 은총을 앞서는 그리스도의 공로
      궤변을 고집하는 어떤 사람들은 Laelius Socinus에(1562년 사망) 대해 언급하는 듯하다 Calvin, Responsio ad aliquot Laelii Socini quaestiones(1555)(CR X. i. 160~165). Socinus가 제시한 질문들은 남아 있지 않으나, 칼빈의 대답에서 추론할 수 있다. 칼빈은 처음 대답에서 언명했다. “하위에 있는 것들은 반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 원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단순한 자비에서 사람이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공로가 동시에 개입하지(et simul interveniat)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인정하면서도, “공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총을 희미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서 듣기도 싫어 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한 도구나 심부름꾼으로 생각하고, 베드로가 부르는 것과 같이, 생명의 주(또는 인도자와 지배자)로는 여기지 않으려고 한다(행 3:15).


      참으로 어거스틴의 지당한 말과 같이 “예정과 은총의 가장 밝은 빛은 인간으로서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는 선행하는 행위나 믿음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인간성으로 이 일을 성취하셨다. 이 사람이 은총을 받아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된 것같이, 모든 사람이 같은 은총에 의해서 믿음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인이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자비를 대립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2)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연결시키는 성경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높은 원인 또는 근본으로서 첫 자리를 차지하며, 그 다음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둘재로 근인이 되어 있다. 그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구원의 질료를 그에게서 구해야 한다. 즉,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는 것이 없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에게 화해시키는 수단으로서 그리스도를 임명하신 것이다. 화해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 칼빈의 <기독교 강요 p.223>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사랑하신 자들을 어떻게 은혜로 받아 주시기 시작했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자기와 우리를 화해시키심으로써 자기의 사랑을 나타낸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의의 원천이시다. – 칼빈의 <기독교 강요 p.725>

          (3) 성경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공로
          바울이 말하듯이, 우리는 화목(화해) 되었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을 얻었다(롬 5:10~11). 그런데 노여운 일이 없으면 화목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시던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죽음에 의해서 노염을 푸시고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셨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뜻이다.

          (4) 그리스도가 대신하심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가 은총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피로 우리가 깨끗이 되며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대속되었다는 뜻이다. 요일 1:7, 마 26:28 참조, 눅 22:20, 요 1:29, 참조, 출 34:7, 레16:34, 히 9:12,13~14,15,22,26,28, 벧전 2:24 참고.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의 율법 말씀에 조명되어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죽음을 경험해야, 즉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소외 관계를 경험해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경험한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의 소외 관계를 극명하게 노출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십자가는 구속 사건이요, 화해 사건이다. – 칼빈의 <기독교 강요 p.754>

          (5)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대가로서 그리스도의 죽음
          우리를 사형에서 구출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대가를 치르셨다고, 사도들은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4~25).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라면, 그리스도께서 그 짐을 담당하시고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 것같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것이 공로가 되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주셨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사도가 후에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가르친 것도 같은 뜻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율법 하에 두신 것은, 우리가 치를 수 없는 것을 그가 치르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그리스도의 살을 “우리의 양식”(요 6:55)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그의 안에서 생명의 본질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힘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의를 위한 대가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속죄의 사역은 단순히 십자가 사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를 화해로 이끌기 위한 “순종의 전 과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의 순종의 절정이었다.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간의 아들에게 전가(imputatio)된 것이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되고,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 칼빈의 <기독교 강요 p.754~755>

          (6) 자기를 위하여 공로를 얻으시지 아니하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가 자기를 위해서 어떤 새로운 것을 얻으려고 내려오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밝히시며, 모든 의심을 일소하신다. 바울이 “이러므로 아버지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하면서 증언한 것을(빌 2:9) 저 사람들은 프랑스어 판에서는 소르본느 학파가 이런 오해를 일으킨다고 했다.


          어리석게 여기에 적용한다. 그들은 묻기를 사람들과 천사들의 모든 능력과 덕성으로도 그 천분의 일도 얻지 못할 만한 것을 한 개인이 얻었으니, 즉 세계의 심판자와 천사들의 머리가 되며 하나님의 최고의 주권을 받으며 자기 안에 저 준엄함이 영원히 있게 하셨으니, 이것은 어떤 공로로 된 일이냐고 한다. 그러나 완전한 대답이 있다. 바울은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높여지신 이유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범으로 삼도록 그리스도의 높여지심은 낮아지심 다음에 있었다는 것을 밝힐 뿐이다. – 칼빈의 <기독교 강요 p.726>

          이 땅에서 복음으로 약속된 것이 마지막 날에 성취될 뿐이다. 이것이 믿는 자들의 위로이다. 루터 신학에 있어서는 칼빈만큼 영화롭게 된 주님의 통치가 강조되지 않았다. 칼빈의 신정(theocracy)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통치(Christocracy)에 의해서 특징 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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