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독일의 신학자 슐라이어마허의 기독론 비평 (2)
1. 슐라이어마허의 역사적 예수로써의 기독론
A. Schweitzer는 슐라이어마허는의 역사적 예수관에 대해, “한마디로 표현해서 슐라이어마허는 예수를 말하지 않고 관념적인 그리스도를 말했다고 평한 바 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역사성이나 그의 실제적인 경험 사실 그 자체 보다는 그 사실에 접하는 자의 주관을 더 중요시했다. 그는 예수의 역사성이나 인간성을 있는 그대로 고찰하려 하지 않고, 예수를 자신의 의식 체계 속에 다 비추어서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는 ”구주의 생활이 교통을 이루고 또 이것이 그에게서만 나오게 하려고 한다면, 첫째는 역사적 개인적 예수가 개념화 되어야 하고, 둘째는 그의 역사적 경험도 개념화가 되어야 한다고“고 주장을 한다.
따라서 슐라이어마허는 공관복음을 Hellenism을 기초로 객관적 사실들로 만을 열거해 놓은 보잘것없는 것으로 평가 절하한다. 그리고 그는 요한복음을 가장 우수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세례 사건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공관복음은 외부적 사건만을 기록하였지만 요한복음은 아무도 갖지 못했던 요한 자시의순수한 주관적 경험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사도 요한의 관점을 따라서 예수님을 초감성적 존재로 묘사한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께서 세계의 온갖 차별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계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인간 영혼의 충동과 투쟁을 초월하여 부동의 자세로 존재하신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면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육체의 기관을 입으신 자로서의 관념성이 개입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재림, 심판 등을 그리스도의 품위론에 배치되는 것으로 보고 배척을 해 버린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문자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내적인 것을 외적인 것으로 기만하여, 자시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본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설명에서 그는 예수님은 무죄하기 때문에 과오를 범하거나 타인의 과오를 실제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인성은 사망에 예속될 수 있는 성질도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대리적인 요소가 없었고, 단지 자발적인 요소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험을 당하신 사실에 대해서도, 그것은 역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타당성을 가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험이라는 용어조차도 기피를 해야 한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역사적 예수의 인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 즉 자기 관찰에 따른 예수”만 말한다. 때문에 “신약 성경보다 더 지혜롭게 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라”는 비난을 듣는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의 신성 이해가 에비온주의(Ebionism) 에비온주의(Ebionism) :기독교인의 율법 준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초대 교회의 이단 분파 기독교의 첫 교인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고, 그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이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이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게 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조상 대대로 믿어오던 유대교의 전통과 가르침을 어떻게 그리스도 신앙과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은(Jewish Christians) 아직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유대교와 다른 새로운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을 고수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율법 준수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바울을 적대시하게 되었고 그리스도 신앙을 유대교의 틀 안에서 견지하려고 하였다.
2세기 말에 활동했던 교부인 리용의 이레니우스는 에비온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하지 않음.
-바울 서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서 중에서도 유대적 성향이 짙은 마태복음만을 인정함.
-유대교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중시함.
-할례, 율법, 유대인의 생활 방식을 준수함.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불신함. 구약 성서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중시함.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의 인성 이해는 도케니즘(Docetism)으로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고 신성만 주장하는 가현설 주의자 초대교회 이단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역사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역사성과 관련하여 B. Warfield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되고 온전하신 인성에 지나치게 치우칠까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에게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모든 것들이 영원토록 존재한다. 또 우리가 사람인 것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도 완전한 사람이시어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을 인정하는 것은 크나큰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2. 슐라이어마허의 로고스의 개념
슐라이어마허는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기 위해서 “신앙론”을 썼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로고스의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는 말씀에 나오는 말씀, 생명, 말을 그리스도의인격의 세 양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말씀으로서 생명이며, 생명을 나누어 주는 능력자이며,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와 창시자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셨다고 하면서도, 그는 결코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사람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와 같은 유한성을 가지고 태어난 말씀(Logos)에서라야 우리의 유한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되고, 또 그 해결 원리도 발견할 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빛이라고 불려지는 이유는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라고 본다.
슐라이어마허가 주장하는 말씀(Logos)은 영원한 신적 존재의 성육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말씀은 의식의 형태로 표현된 하나님의 활동이요,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그에게서는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로 인간을 찾아오신 영원 신적 존재로서의 로고스 사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이 로고스 개념에는 신격화 되어진 선각자로서의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인간의 신격화로서의 로고스 개념은 L. Berkhof가 지적한대로, 범신론 범신론(汎神論)은 우주, 세계, 자연의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하는 세계관이다. 만유신론(萬有神論)이라고도 한다. 모든 것은 신의 발현이며 그 속에 신을 포함한다고 한다. 세계를 신의 변형(變形)으로 본다(스피노자).
3.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
1) 슐라이어마허가 이해한 구속의 의미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구주가 되시는 이유를 드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자신의 신 의식 속으로 이끌어 들여서 자기가 이룬 승리의 영광을 나누어주기 때문이며, 둘째는 우리를 자신의 축복된 친교 가운데로 받아들여서 불의나 죄책으로 인한 저주로부터 자유 함을 얻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단회적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자신의 영혼 속에서 스스로 이루어 가는 과정으로 본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신 의식, 절대 의존 감정이 가장 우수한 상태로 표현되는 경험의 상패를 구속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그는 영혼이 중용, 평안, 안정을 누리는 것 또는 감정의 희열이나 쾌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구속의 상태라고 한다.
리런 이유 때문에 박형룡은 슐라이어마허의 속죄 개념을 가리켜서, 정통적 용어의 의리를 오해하고 있을 분만 아니라, 성경의 교훈을 곡해한 것이며, 속죄의 객관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구약 성도와 영아들의 구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생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2) 슐라이어마처의 그리스도의 원형성
슐라이어마허는 구속주의특징을 ‘원형성’과 모범성‘이란 말로 집약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원형성을 통해 구속주가 되시고, 모범성을 통해서 그 구속을 성취하심을 의미한다.
먼저 슐라이어마허는 원형성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의식의 절대적인 힘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 의식을 소유했다.
마지막 아담으로 창조의 완성자가 되셔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과 동일한 새 창조의 완성을 이룩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범성은 구속주로서의그리스도가 역사적 인물임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물로서 완성된 인간의 모범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범성에는 생산성이 결여되어 있다. 생산성은 오로지 원형성의 개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원형이었고, 그 원형성이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사실이었다면, 그리스도 역시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인류 공통 사회의 죄악에 물들지 않고 원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슐라이어마허는 본래의 그리스도에게는 원형성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기는 했지만, 구원을 가져다 줄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구원의 능력이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의 자아 의식이나 종 의식(種意識) 종(種): 씨 종, 식물이나 동물의 씨, 근본, 원인, 혈통. 여기에서 종 의식은 혈통 의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원형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 즉 그의 절대적인 신 의식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원형성과 모범 사이에는 지나친 비약이 있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도 구원할 수 없는 자아 의식을 가지고 있던 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인 방법에 의하여 만인을 위한 구속의 원형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속주는 완전하고 무죄하신 하나님 자신이셨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신 의식의 충만 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자신이 되어 질 수는 없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구속 받은 자의 원형이 되신다고 한 것은 그가 마음에서부터 신 의식을 쫓아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완전에 도달하데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원천이심을 뜻한다.
성경에는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범이 되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모범을 따르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고, 자신의 의식적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J. Calvin이 주석한대로,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원형성과 모범성은 본래 은혜를 입은 제한된 택한 자들에게만 적용이 되도록 의도 되었기 때문이다. (J. Calvin, Commentary on the 1 John 2;2, in the Catholic Epistles, Edinburgh: Calvin Transltion Society, 1855., p.173.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