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독일의 신학자 슐라이어마허의 기독론 비평 (3)

▶ 19세기 독일의 신학자 슐라이어마허의 기독론 비평 (3)

1. 슐라이어마허가 본 ‘구속의 대상인 인간의 죄’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의 본질을 설명할 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약함과 강함, 또는 무지함과 지혜로움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인간의 죄관은 진화론적 경향이 있고, 인간의 신 의식은 우리 자신의 낮은 성질들로 말미암아서 약화되고 더러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영의 활동으로 생기는 영과 육의 충돌이 바로 죄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선을 인식하는 능력이 발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현시킬 의지력이 따르지 못함으로 죄가 인간 본성이 필연적인 요소이다.

2. 슐라이어마허가 본 ‘인간의 최초 범죄’


슐라이어마허는 아담과 하와에게서 최초의 죄가 발생하게 된 것은 그들이 가졌던 본래 죄악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인류 최초의 범죄는 그 자체가 개인적이고 평범한 사건으로서, 인간 본성을 변질시킬 만한 특별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고 본다.


슐라이어마허의 죄관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죄의 보편성의 강조이다. 아담과 하와에게서 볼 수 있는 영과 육의 본질적 충돌은 모든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슐라이어마허는 아담의 범죄와 인류의 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사도 바울이 아담의 죄와 후손의 죄를 구분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최초 범죄의 결과와 관련하여 말하기를 아담의 범죄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나 무능력 즉 신 의식의 안전함 상실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신 의식의 활동이 위축되어 영혼마저도 육적 지배 아래 놓이게 되는 결과만을 초래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범죄 이후에도 그 본성 속에 여전히 신 의식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시적으로 손상되었던 신 의식의 각성 활동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고 한다.

3. 슐라이어마허가 본 ‘죄의 기원과 하나님과의 관계’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입장과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났다는 두 생각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죄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일시적인 불완전 상태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러한 불완전 상태로서의 죄 의식이 잇는 것은 선, 즉 완전을 목표로 한 신 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죄의 보편성과 사회성을 새롭게 환기시키고, 속량 이외에는 죄를 고칠 방법이 없다는 주장으로 정통 신학의 상당한 관심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박형룡이 지적한 것처럼 죄의 보편성을 생득적, 본래적인 것에서 찾음으로서, 죄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인하고 죄악과 죄책을 순전히 주관적인 것과 종교적인 사건에 관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 결과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지 않으려 했던 그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무관하게 신 의식에 반항하는 자아 의식의 불완전 상태로서의 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자아 의식에서부터 비롯된다는 한계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슐라이어마허가 본 ‘그리스도의 무죄성’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이 발전함에 있어서는 불가피하게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인 죄를 모면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경우만큼은 무죄하심을 옹호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도덕적 절대 순결을 기독론이 원칙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범죄적인 공동생활 속에 들어오신 것이지 거기서 생겨나신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안에서 한 기적적 사실로 인정받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의 무죄성과 완전성의 근거를 외부 환경에서 찾지 않고,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찾았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는 시초부터 선조들로부터 전해내려 오는 온갖 범죄적인 영향과 신 의식을 교란시키는 영향에서부터 자유 함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섭리로 돌린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는 무죄, 완전하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잘못도 없는 절대무오한 분이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는 그 자신 스스로 진정한 과오를 만들어낼 수도 없었고, 다른 사람의 과오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생 때부터 죄악 된 인간들과 전적으로 차원을 달리하지 않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무죄함이나 완전함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선지자와 사도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사람 중에서는 그 누구도 의로운 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시 14:1-3, 롬 3:10-12).

5. 슐라이어마허가 본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슐라이어마허는 첫 아담에게는 인간성에 대한 영의 참여가 불충분 했고, 또 그의 영은 감각 속에 매몰되어 있었는데, 이는 더 좋은 것의 도래를 전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첫 아담은 미완성의 피조물이었고, 이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인 둘째, 아담 존재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 둘째 아담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는 자신을 우리와 구별되게 하는 것처럼 자신을 아담과도 구별되게 하여서,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자연 질서 속에서는 달성할 수 없었던 ‘보다 높은 생명(des hoheren Leben)’을 창조하게 하신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를 보다 더 완전한 생명의 창시자요 인간 창조의 완성자가 되시는 것으로 여긴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완성자로서 하시는 일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인격의 형성’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해서 완전히 죽고 의에 대해서 새롭게 살아나게 하는 새 생명의 창조자가 되시는 분이 아니라, 새로운 성향을 지니는 인격의 형성자가 되심을 의미한다. 그런데 새로운 성향의 인격 형성자이신 그리스도는 설교를 매체로 사용하여 자신의 생명을 전달시키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서 자신에게로 동화를 시켜 나가는 동일화의 과업을 달성하신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그 결과로 첫 아담은 물질세계를 완성하게 되고, 둘째 아담은 인간의 영적 창조를 완성하게 된다고 말한다.


<히 7:22>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속죄의 “보증”이라고 한다. 보증은 타인의 모범이나 원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보증은 타인의 법적 의무를 대신하는 법률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시는 것은 슐라이어마허의 주장처럼 그가 죄인의 모범이 되신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법적으로 대신하여 보증하신다는 의미에서 중보자가 되신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기 자신의 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중보자이시다.

6. 슐라이어마허가 본 ‘그리스도의 삼직’


슐라이어마허는 전통적 교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역사적인 의의로 보아 그 존재 가치는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교회 때부터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하여 가지고 있었던 진술들의 통일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을 논하고 있다.

7. 슐라이어마허가 본 ‘그리스도의 선지자직’


슐라이어마허는 19세기 신학의 공통적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을 강조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을 교훈, 예언, 이적 행사라는 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선지자 직분의 첫 번째 요소인 그리스도의 교훈은 유대인의 율법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경험 위주의 학교 교육의 경우처럼 일반적으로 인간의 이성을 그 대상으로 하여 자기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모든 사상 속에 침투되어 그를 지배하고 있던 신 의식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모든 교육 내용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자기표현이라는 의미에서 본질적 성격을 가진다고 본다. 왜냐하면 자시의 고유한 신 의식을 나타내는 것만이 효과적으로 인간들을 자신과의 교제관계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의 두 번째 요소인 예언적 요소에 대해서는 신비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들과 다른 것으로 본다. 메시아는 잣기 자신의 인격 안에서 이미 성취된 것만을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예언적 요소는 성취하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요소인 이적들에 대해서는 그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그의 교훈을 확증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볼 수 있는 기능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이적이 일어난 시간과 장소를 떠나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이적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재해석 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8. 슐라이어마허가 본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그의 율법의 완전한 성취(능동적인 순종)와 죽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수동적 순종) 그리고 아버지 앞에서 신자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은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완성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수동적인 순종은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완성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의 명확한 구분을 반대하고, 그리스도의 신 의식의 활동 속에다 모두를 포함시킨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이사야 선지자의 분명한 지적에서 보는 것처럼(사 53:4-6) 사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하나님의 공의와 연관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단순한 동정심의 발로가 아니라,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9. 슐라이어마허가 본 ‘그리스도의 왕직’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의 왕직을 신자들의 공동체가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오는 축복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한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의 증거에 의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증거에 따르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뜻하신 계획이 한 사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가 머리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의 왕권과 하나님의 일상적인 섭리의 관계를 은혜의 나라와 권세의 나라의 관계에 비추어 설명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나라는 오로지 은혜의 나라와만 관계한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에게서의 그리스도의 왕직은 두 가지 점에서 정통적인 견해와 비교가 되어진다. 그리스도의 왕직은 오로지 사람과만 관계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다스림은 온 우주에도 미친다. 그는 본래 하나님이시기에 바람, 폭풍, 나무, 질병, 죽음 등도 다스리신다. 그러기에 그의 왕직은 우주적이며, 관념적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현세를 뛰어 넘어 장차 원수까지도 발 아래 굴복시키는 왕직이다(빌 2:10-11). 빌 2:10-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H. Hoeksema는 이 사실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의도는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완전한 왕권을 첫째 아담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하늘로부터 오신 둘째 아담에게 올리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천지만물의 왕으로 영원한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으시어서 그의 택하신 백성의 주로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시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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